올해는 ‘클라라의 기쁨’을 주제로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클라라를 아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가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 것이고,
그래서 그의 삶은 거룩하기는 해도 기쁨이 없었을 거라고
많은 분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 제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클라라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시련이나 수치도,
세상의 멸시도 마다하지 않고,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유언 27-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의 종 프란치스코를 통해 한번 알게 된 다음부터는,
어떤 고통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 어떠한 고행도 격렬하다 할 것이 못 되었으며,
아무리 병이 들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클라라 전기 41)
그러니까 거룩하면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사람이 기쁘고 행복함을 클라라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즘 계속되는 칼부림과 그것을 보고서 모방 범죄를 하겠다는 것을 보면서
전문가들은 심리적이고 정신병리학적인 차원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말하지만
저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불행한 많은 젊은이의 행복한 이에 대한 분노입니다.
나만 불행하고 다른 이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실은 젊은이들이 거의 불행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생각하면 어찌 이리 쉽게 불행할까,
행복하기가 왜 이리 힘들까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바이지만
건강에는 육체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 정신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
이 네 가지가 있는데 많은 젊은이가 육체만 빼놓고 다 불 건강하거나
육체도 허우대만 크지, 면역력 면에서 그리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거룩한 사람이 제일 건강하고,
영적으로 제일 건강하기에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하며,
그렇기에 가난도 고통도 제일 잘 견딜 수 있으며,
견딜 뿐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클라라에게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지
마음의 고통이나 정신과 영혼의 고통은 아닙니다.
가난이나 병은 육체를 괴롭힐 뿐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말이고,
이런 것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타게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가난이나 고통은 두려워하고 피하면 오히려 쫓아오고 달라붙지만
껴안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껴안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것들을
땔감 삼아 사랑이 불타오르고 기쁨과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가난하기에 오히려 기쁘고,
고통스럽기에 오히려 행복한,
클라라의 그 사랑의 경지를 배우라고 주님으로부터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