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안에 불을 놓으시는 진리이시며 선하시고 아름다움이신 성령
마르틴 부버는 ‘모든 관계는 너와 나와의 관계이며 너와 나와의 관계가 아닌 관계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사물과의 관계처럼 어느 쪽에도 존엄성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와 그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관계 맺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을 조종하거나 회유하려는 어떤 시도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수를 헤아리거나 희생의 수를 따지면서 이만큼 했으니 들어 달라는 기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조종하거나 회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관계 안으로 흘러가도록 진솔하게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가 아닌 깊이 연결된 참된 우정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나를 견디시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와 희생이라는 업적과 공로로 하느님을 조종하려는 이들에게는 실패한 사랑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실패를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는 상호 관계성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바치기만 했던 이들은 무심한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대상의 합당함이나 부당함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 자체로써 참된 진리이며 선이시고 아름다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에서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에 내재 된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당신의 피조물을 통해 드러내시며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지탱시켜 주시고 치유를 통해 원복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고 예수께서 타볼산에서 들었던 목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드러내 주는 성령께서 관계성의 모델로써 우리를 비추고 계십니다. 무상으로 주어진 이 관계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에 참여하는 이 신비야말로 구원이라고 말하는 실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분출되는 선이며 관계성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자연 안에 살아 숨 쉬는 창조된 생명들, 다른 모든 피조물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치유하는 힘으로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성령께서는 관계 안에 머무시면서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연결하도록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