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는 일과 쉼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휴가 1 바라봄
초원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을 전령사들이 연주하던 교향곡도 마지막 악장을 향하고, 기상을 알리는 새벽닭의 힘찬 나팔 소리도 희미해지고, 밤바다를 밝히던 갈치잡이 어선들도 귀항을 시작했습니다. 아침이슬에 젖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가축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젊음과 윤택함을 싱그럽게 뽑아 올리던 나무들이 나이 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봅니다.
휴가 첫날
내 마음은 통풍이 잘되고 가슴은 촉촉하게 젖어있습니다. 흐르는 시간의 물이랑에 싱그런 잎새를 띄우고 집을 떠나 존재의 밑뿌리를 살펴보았습니다. 보이는 현상에만 머물러 보이지 않는 본질을 잃어버린 삶은 그 근원에서부터 어둡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어둡고 내 영혼도 어둠에 길들어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감정의 단편들이 생명을 노래합니다. 푸른 초원에 이슬이 내리듯, 뜨거운 태양이 가을 청과에 단맛을 내듯, 견디는 일과 기다리는 일, 먹이고 품어내는 일,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그 흐름 속에서 생명이 살아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길을 떠나온 사람들, 길을 가야 할 사람, 무지의 구름에 가려 캄캄하던 앞길에 빛을 비추고 동반의 길에서 부축의 팔로 서로를 지탱하도록 만남을 통해 먹이시고 돌보아 주는 영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사람끼리 만나고, 피조물끼리 만나는 거기, 황송한 안배로 창조의 영역을 확장하시는 하느님께서 두 손에 선물을 들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간하도록” 무지의 구름 속에서 시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진실하면 즐거움을 줍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유쾌함을 주는 사람과 기쁨과 자유를 주는 사람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의 자유를 내어 드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나를 내어줄 일들이 보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을 공유하는 기쁨이 거기에 있기에 공유된 선으로 행하는 선은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비천하고 나약한 나를 당신 선의 도구로 쓰신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 벅찬 일이며 비교할 수 없는 행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휴가 2 흔적을 바라보는 마음
오랜만에 만나, 긴 세월 저마다의 삶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나눠지지 못한 고독을 거느리고 살아왔음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형식과 체면의 겉껍질을 감추고 살아온 흔적, 여름날 한낮의 더위에 진초록의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오밤중에도 간간이 생명의 전율에 몸을 떨었는지 모릅니다. 그 흔적들은 놓아둔 채, 평범한 일상처럼 단순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은총이란 결국 특별한 만남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장 귀중한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서로의 깊은 신뢰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나옵니다.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삶의 가장 깊은 진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타인과 더불어 공감하는 행복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라도 미리 그것을 마련한 손길이 있었음을 믿습니다. 사는 건 진실로 고요한 경탄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깨달음을 얻어 영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그 감탄하올 축복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만남 안에 깃들이는 은총을 충실히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하루를 맞았습니다. 오늘은 어떤 얼굴들과 만나게 될까? 모든 피조물 안에 깃든 아름다움이 나를 반겨줄 것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