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돌보아라.”
제가 결혼을 하였다면 저는
제 아내의 끊임없는 사랑 확인에 무척 곤란해 했을 겁니다.
저도 보통 남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아내를 사랑하지만 연애 때의 그런 사랑이 아닐 거고
사랑 고백도 연애할 때처럼 가슴 떨리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도 그렇게 곤란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베드로 사도의 당신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세 번이나 당신께 대한 사랑 고백을 하도록 베드로 사도를 조이시니
베드로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죄였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궁금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세 차례나 사랑하는지를 물으시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이 아신다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처럼
모르지 않고 다 아실 텐데 왜 그렇게 물으시고 조이시는지.
그것은 베드로 사도의 사랑이 여물게 하고 단단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 확인이 연애 때의 사랑을 확인하는 게 아니듯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 확인도 옛사랑을 확인 하자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식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사랑하는지를 확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첫 사랑 고백은 뜨거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 세 번이나 확인 받았을 때 그는 세 번 다 배반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배반하였으니 세 번이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물으실 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배반을 추궁하시는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주님의 뜻은 추궁이 아니라 무른 사랑을 여물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주님의 뜻은 이것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사랑이 더 여물고 단단해져야 한다는 촉구일 뿐 아니라
당신뿐 아니라 당신 양들에게까지 사랑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촉구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이제 베드로의 사도의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그쳐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주님의 양들까지 돌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실 유혹을 느낍니다.
주님만 사랑하며 살고픕니다.
형제들을 돌보는데 지친 어떤 관구장이 이제 그 소임을 끝내고
하느님과의 일치에만 신경 쓰며 살 수 있는 은둔소에 갈 허락을
프란치스코에게 청했을 때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이든,
또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때리면서까지 방해하든,
이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대는 이런 것들을 원하고 다른 것을 원하지 마십시오.
그대에게 이런 것들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십시오.”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것에는 이런 유혹과 함정이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주님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유혹과 함정입니다.
주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제쳐놓으려는 유혹과 함정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이라고.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런 유혹과 함정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고, 함정에 빠지는 걸 미리 일깨우고 차단키 위해
주님께서는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은 내 양들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세 번의 질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으로 사랑이 단단해지고 확장된 베드로 사도는
이전의 잘못과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순교도 하고
주님의 양들을 잘 보살폈을 뿐 아니라 자기를 뒤따르는 원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1베드5,2)
말은 싶지만 최고 어려운 부담 주님께서 아시니 위로와 희망을 얻습니다.
오월의 아카시아 찔레향 행복합니다. 감사드립니다.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