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들
믿는 이들의 최종 목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신비로 상호 존중과 자유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두가 마음의 위로를 받고 사랑으로 일치하여 그 깨달음의 충만함으로 온전히 부요하게 되어 하느님의 신비인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분 안에 지혜와 보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로 2,2-3)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더 큰 미래에 넘겨드리고, 우리의 짧은 인생을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자신이 만든 우물 안에서 고독하고 슬프게 죽어갈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에 사랑으로 결합 되어 진리 안에서 계속 머물기를 희망하는 삶이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눈길로 돌아가서 그분의 눈으로 보고, 듣고, 향기를 맡고 맛보고 만지는 일입니다. 본질적인 앎은 남들이 들려준 객관화된 지식을 들어서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며 이원론적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앎입니다. 새로운 인식, 인식의 재인식,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영감을 받아 깨닫게 되는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식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실천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아버지의 이미지로 바꾸는 데서 나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기초를 내면에 마련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모르고 아들 예수님도 모르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신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알려주신 아버지 하느님만을 알뿐입니다. 이방인의 신들처럼 사람이 만들어 낸 하느님이 아닙니다. 종교심에서 나온 하느님의 모습은 힘으로 통치하시는 하느님이지 아버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꼭대기에 계시지 않고 우리 곁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고정된 하느님이 아니라 움직이시는 분이시며, 결과보다 과정을 주의 깊게 바라보시고, 본질적인 규범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계속 하느님의 눈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특별한 기술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무상으로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꿔야만 하느님과 나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피조물과 나 사이에 관계의 혁명을 이루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지금 여기 관계 안에서 발견하고, 아버지의 뜻이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나를 통하여 관계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매우 친밀하게 불렀던 이름은 엄마, 아빠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때 아빠 하느님이라고 불러도 체험된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불렀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만 불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주시는 사랑에 대한 고마움이 감사와 감격에 넘치고 충만한 기쁨에 넘쳐 응답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부릅니다. 체험된 하느님을 관계 안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고 최상의 흠숭을 표현하였습니다. 자신을 아는 지식과 하느님을 아는 경험된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기도합니다. 진정한 기도의 기적은 나를 진짜로 바꿔놓는 데 있습니다. 기도가 자신의 변화로, 자신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로, 관계의 변화가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면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너와 나와 피조물 안에서 자비와 선의 흐름을 타고 생명을 노래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나의 사랑이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하느님 像이 나를 만듭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 像이 나를 바꿔놓습니다. 내가 아는 하느님 像이 나를 알게 합니다. 내가 아는 하느님, 하느님이 아는 나, 둘은 점점 닮아갑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지어낸 하느님 像, 초기에 굳어진 인식을 바꾸는 것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이며 새로운 앎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경탄하고 감동할 때 변화하는 삶이 시작되며 변화할 때 기쁨이 시작됩니다. 원천의 사랑이 그리운 이에게 애끓는 사랑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입니다. 기쁨으로 벅찬 사람은 감탄하는 기쁨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선은 그렇게 확산하는 신비로 관계를 비추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