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 준비하고 깨어있는 자들이 누리는 현재의 행복
11월에 자주 듣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미래에 있을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중요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와 연결되어 있고 현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왜, 누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를 중심으로 살았던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왜 하는지를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여 나를 내어주는 삶으로 바꾸라는 교회의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현재와 종말은 언제나 현재의 나와 관련된 회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회개는 말씀을 받아들여 현재의 삶으로 육화시키는 삶의 현장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성서를 읽으면 회개하라는 이야기가 나를 제외한 누군가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자신은 의롭고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먼저 행해야 할 사람은 언제나 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에 대한 말씀은 나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바로 나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살아가는지를 살피지 않는다면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시간은 지금이며 지금이 영원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한 종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와 종말에 관한 말씀은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회개할 사람은 바로 나이고 회개할 시간은 바로 오늘입니다.
회개는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일이며 하느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일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나를 도구 삼아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고 나면 또다시 나를 중심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먼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씀이고 그 시간은 바로 현재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종말 사이에 나의 현재가 있습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 현재, 오늘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내가 변하고, 내가 변하면 관계가 변하고, 관계가 변하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탐욕이 저지른 전쟁의 처참하고 참담한 이야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듣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와의 전쟁의 이야기뿐 아니라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공동체 사이에서 지방과 지방,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참혹한 폭력이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나만 챙기겠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존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의 연대가 공존의 가치를 심각하게 무너뜨립니다.
선을 어둡게 만드는 헛된 환상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으면 지배하고 독점하기 위하여 폭력을 행사합니다. 성서를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고 어떤 구절은 외면하고 어떤 구절만 골라서 읽으면서 성경을 가지고 저지른 수많은 행위에 대하여 참회하는 마음도, 회개할 마음도 없이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무상성을 인과응보의 논리로 해석합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면서 이를 정당화시킵니다. 인류가 저지른 참혹한 전쟁과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보면 종교전쟁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서를 자기네 목적에 이바지하는 수준으로 읽으면 성서를 이용하고 써먹기 위해 읽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들은 남을 바꾸는 데 성서를 이용하지 않고 자신을 바꿔놓게 합니다.
회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이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이 살아있게 만드는 육화의 현장입니다. 영성은 자기 고집을 부추기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기꺼이 따름으로 시작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삶의 현장이며 구체적인 실제입니다. 영성은 첫째가 되고, 옳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 남보다 뛰어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기꺼이 포기하게 합니다. 거기에는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과 내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자만심이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영성은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38)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마태 26,39)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자기를 기꺼이 내어주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회개는 준비하고 깨어있는 자들이 누리는 현재의 행복입니다. 벌이 두려워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이들이 누리는 현재의 행복입니다. 선은 그 자체로 보상이며 악은 그 자체로 처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