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제, 뭔가를 청하려고 온 사도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셨지요.
주님께서는 오늘, 바르티매오에게도 똑같이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제 생각에 마테오복음도 그렇고 오늘의 마르코복음도 그러한데,
제자들이 권력을 청하는 어제 얘기에 이어 바로
바르티매오가 치유를 청하는 오늘 얘기를 배치한 것은
분명 어떤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어떤 의도?
제 생각에 그것은 바라는 것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바라는 것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두 제자는 주님의 제자임에도 세상의 권력을 바라고,
제자도 아닌 바르티매오는 오히려 자비를 바랍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대조입니까?
출가한 주님의 제자, 그것도 주님의 첫 제자이고 가장 사랑받는 제자가
속가의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더 세속적이고 육적입니다.
뜨끔한 것은 이것이 다름 아닌 저와 신자들의 관계라는 점입니다.
세속을 떠나 수도생활을 한다는 제가
세상 한 가운데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분들보다 더 세속적이고,
세상을 복음화해야 할 제가 여러분들보다 더 세속적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돌아봤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누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돌아봤습니다.
주님의 두 제자가 권력을 바랐지만 그래도 어쨌건 주님께 바랐는데
나는 주님께보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이 더 잘못 되었을까요?
주님께 권력을 구한 제자들보다
주님께 바라는 것이 아예 없는 제가 더 잘못 되었지요.
어제는 미사 중에 분심이 들었습니다.
같이 미사 드리는데 형제 중 하나가 자세도 공손하지 않고,
성가도 열심히 부르지 않아서 내내 제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는 제가 보이면서
제가 하느님께서 제사를 봉헌하면서 사람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고,
제가 하느님께보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더 많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형제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고작 자세를 똑바로 갖는 것과 성가를 열심히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람에게서 만족을 구하는 존재이고,
그것도 별 것도 아닌 것에 만족하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이런 가련한 저를 보면서 저는 시편 43편을 떠올렸습니다.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그리고 시편의 저자처럼 저를 타일렀습니다.
하느님께 바라라. 레오나르도야!
사람에게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 바라라.
바랄 것을 바라라. 레오나르도야!
쓸 데 없는 것 바라지 말고 바랄 것을 바라라.
돈을 바라지 말고 사랑을 바라라.
권력을 바라지 말고 구원을 바라라.
세상 것을 바라지 말고 천상 것을 바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