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참으로 밝고 약간은 들떠있습니다.
색으로 치면 연분홍이고 분위기로 치면 들뜬 분위기입니다.
기쁨, 즐거움, 행복, 복됨 등의 단어들이 여기저기 난무합니다.
복되고 행복한 두 여인의 기쁘고 즐거운 만남의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마리아는 집을 떠나 서둘러 엘리사벳에게 갑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를 반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고 가고,
엘리사벳은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이런 만남을 보면서 한 번 우리의 만남을 돌아봅니다.
나의 만남은 주로 어떤 만남인지,
나의 만남 가운데는 이런 만남이 있는지 말입니다.
며칠 전 저희 개 때문에 생각을 좀 한 것이 있습니다.
호순이라는 나이든 암캐가 있는데 다산의 여왕입니다.
한 겨울에 새끼를 낳고 얼마 전에 또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6개월 사이에 두 번이나 새끼를 낳은 것입니다.
밖을 나가니 그 호순이가 앉은 채 꼬리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련 형제가 나오니 펄쩍펄쩍 뛰면서 반기는 거였습니다.
순간, “조 년이 나보다 수련 형제를 더 좋아하네.”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을 더 해보니 수련 형제를 반기는 호순이의 속이 들여다보였습니다.
저는 밥을 안 주고, 수련 형제는 밥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니 요즘 속이 얼마나 헛헛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기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당연히 반갑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저를 한참 생각게 했습니다.
호순이가 반긴 것은 밥 때문일까, 수련형제 때문일까?
반기는 것이 밥일까, 사람일까?
사랑 때문일까, 잇속 때문일까?
우리 인간은 뭔가 다를까?
내가 반기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튼 나를 만족케 하는 존재를 반길 것입니다.
혹 내가 호순이와 다를 수 있다면
밥의 만족을 넘어서는 그런 만족의 존재를 반길 것입니다.
영적인 만족을 주는 존재 말입니다.
오늘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를 반깁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의 만족은 성령으로 가득 찬 만족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찰 때만이 즐거움과 기쁨이 동시에 가능하고,
잇속이 아니라 진정 인격적인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서둘음도 성마른 자의 조급함이 아니고
분명 성령이 재촉하는 열망의 서둘음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그 구원의 업적을 알아보고,
같이 기뻐하고 공감해줄 사람을 보고픈 열망이 그렇게 서둘게 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서두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