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는 예루살렘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받아들이기는 더 힘든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죄도 없는 아기들이 살해된
이 참혹한 사건을 순교라고 찬미하는 축일을 지내니 말입니다.
이것을 순교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포장이 아닙니까?
예수님 때문에 죽은 것을 예수님을 위해 죽은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참사라고 해야지 순교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의문과 반박에 대해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안 죽는 것이 선이고 구원이라면 아기들의 죽음은 악이고 비 구원입니다.
죽더라도 오래 살다가 늙어 죽는 것이 선이고 구원이라면
두 살도 안 돼서 죽는 것은 참사일 뿐이고 비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주님을 따라가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곧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
당신을 따라 우리가 하늘로 가도록 내려오신 것이 성탄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찬미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순교한 어린이들 기억하면서 찬미의 노래불러 공경하오니
세상은 그들잃고 통곡했으나 하늘은 기쁨으로 영접했도다
포악한 헤로데가 살해했으나 그들을 하느님이 맞이하시어
당신과 함께있게 불러주시고 영원한 천국복락 허락하셨네
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죽음 찬란히 주님앞에 빛을발하니
천사들 두살아래 어린이들을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갔도다
얼마나 축복받은 마을이던가 구세주 거기에서 탄생하시고
순교한 아기들이 첫제물되어 탄생한 주님앞에 바쳐졌으니
그리고 독서에서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위대한 은총의 선물이여!
아기들이 누구의 공로로 그와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까?”
무릇 모든 죽음은 개죽음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윤창호법이 제정되지 않았으면 윤창호의 죽음은 개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기를 그의 부모가 원했고,
다시 말해서 그의 죽음 덕분에 음주 운전이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부모가 바랐고 우리 사회가 부모의 바람을 받아들여 법을 제정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의미 있고 숭고한 죽음이 되게 하였는데 이것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이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은 것 곧 순교로
의미 제고함으로써 죄 없이 일찍 죽는 것이 악이요 참사가 아니라
더 선이고 구원임을 받아들이게 교회는 우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알더라도 가자 지구에서 아이들이 죽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힘들고 그들의 부모는 더 힘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아이까지 학살하는 폭군들의 죄악까지
우리가 괜찮다거나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오늘 이 축일은 아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인간의 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일깨우게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