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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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구약의 계명으로 시작됩니다.
‘거짓맹세를 해서는 안 되며 그대로 주님께 해드려야 한다’는 이 계명은
주님께서 모세와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하신 명이었습니다.
처음에 말씀을 읽으며 내용이 맹세에 대한 부분과
말할 때에 정직해야 함에 대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맹세에 대해 묵상해보니 조금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맹세’라는 단어는 사실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하거나 접하게 되는 단어는 아닙니다.
드라마나 소설 가운데에서 신하가 왕에게 하거나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하기도 하는데,
성경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판관기 11장에 나오는 판관 입타는 이스라엘을 침입한 암몬족에 맞서 싸우기 전 승전을 보장해 주신다면
자신을 맞으러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그 결과 승전가를 부르며 자신을 맞으러 나온 하나뿐인 딸을 주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드리라는 계명에 따른 것입니다.
‘맹세’는 타동사와 자동사로 나누어 그 뜻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타동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임무나 목표를)꼭 실행하거나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하다.’를 뜻하고 자동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찌하겠다고)굳게 다짐하다.’를 뜻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맹세’는 자동사로서의 맹세인 듯합니다.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맹세는 이처럼 그냥 할 수 도 있고 무언가를 두고 할 수도 있는데 그 차이는 서로간의 신용에서 옵니다.
서로가 온전한 신뢰의 관계에 있다면 무엇을 두고서 맹세하지 않아도,
어쩌면 구태여 맹세 자체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신용이 낮다면 맹세를 해서라도 자신을 믿어주기를, 안심하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용이 낮을까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맹세코 행위 해야 할 바가 지극히 어렵거나 행위자가 상대방 혹은 자기 자신을 기만할 경우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무엇을 두고 맹세하면 안 되는 이유는 주님께 모든 것이 있으며
맹세의 주체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부님은 권고 19에서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라고 우리의 처지를 일깨워줍니다.
이 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습과 죄밖에 없을지라도
그렇기에 겸허히 그렇게 약하고 가진 것 없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만큼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굳이 무엇을 대거나 걸고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1독서에서 이 믿음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형제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