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제가 불랙 리스트에 올라 중국에 갈 수 없고
그래서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를 하지만
전에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종종 만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아는 지하교회 신부님을 만나러 갔는데
그분이 미사 중에 공안에 끌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베드로 사도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신자들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저도 그곳 신자들과
신부님이 풀려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한밤중에
마침내 신부님이 풀려나는 뜨거운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은 아직도 이렇게 옛날 우리 박해시대 때처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그들과 함께 미사 드리거나
그들에게 강론하면 통역을 두고 하는데도 그들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제가 그들에게 뭘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도 귀한 것을 많이 받고 돌아옵니다.
그날도 그들과 밤새도록 기도하고 신앙 대화를 나눈 뒤
떠나기 전에 강복을 주는데 신자들이 모두 흙바닥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어서 놀랐고 모두 저의 바짓자락을 붙잡아서 더더욱 놀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신자 중에 이렇게 강복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제가 그리 소중하지도 않고 사제를 그리 존중하지도 않잖습니까?
그리고 강복도 그야말로 흔해 빠진 강복이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중국의 지하교회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저 부모로부터 이어온 지식과 전통에 의지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렇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강복 때 사제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행위도 그런 그들의 전통과 열성의 표현 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이 전통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한 고을을 찾아가시고,
그러면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고,
이 땅에 오셔서도 한곳에 편히 머물지 않으시고
계속 이 고을 저 고을로 병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주님께 병자들도 몰려듭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산과 내를 건너서 오시는 주님 사랑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은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열성입니다.
아니, 열성 이전에 절실함입니다.
‘주님, 당신이 없으면 저는 안 됩니다.’라는 절실함입니다.
그런데 이 열성과 절실함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열성과 절실함이 우리에게 없어도 우리를 치유해주실 분이지만
우린 이 열성과 절실함이 있어야만 주님의 치유에 충실하고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인 의사에게 갈 때도 이런 충실함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신 아니면 의사가 없냐는 태도로 가면 의사의 처방과 치료에 충실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붙잡는 행위는 이 열성과 절실함의 표시이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병자들과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 당신 없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며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매달립니까?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너무도 이상하게도 그리고 너무도 죄송하게도
2주 연속 주일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제목만 올리고 내용은 올릴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라고,
혹 다음 주에도 그런 일이 발생하고,
제 강론을 메일로 받기를 원하시면
문자로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이메일로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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