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이신 저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곧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하면
사실만큼 사셨으니 이제 돌아가셔도 된다고 얘기들 하시고,
제 욕심에 더 오래 사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저도 이제 돌아가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몇 살까지 살아야 살만큼 산 것입니까?
그리고 몇 살 이상이면 너무 오래 산 것이고,
몇 살 이하이면 너무 일찍 죽는 것입니까?
대략 7-80년 살면 적당하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 경우이고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면 그렇게 꾸역꾸역 오래 사느니
빨리 데려 가시라고도 하는 우리입니다.
아무튼 삶과 죽음이란 물리적 시간의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 즉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재내는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 축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질문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일찍 죽을 걸 왜 태어났을까?
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은 왜 있는 걸까?
저는 십대 때부터 삶의 의미 문제를 가지고 너무 고민을 하였고
그래서 자살 장난 같은 것도 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큰 의문은 결국 죽을 걸 왜 사느냐였고,
그것도 고통스러운 삶을 왜 살아야 하느냐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면 빨리 죽지 오래 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삶과 죽음의 절대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다면 오래 살건, 빨리 죽건 그게 그거고,
행복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살건, 저 세상에 살건 마찬가지다.
거대한 영원 안에서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이란
정말 거대한 바다의 작은 돛단배, 아니 낙엽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순간에 영원을 담는다면,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을 산다면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이 세상에서 죽는 것도 다 영원의 현재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삶과 죽음이 영원과 맞닿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영원을 산다 해도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이 영원의 지옥이니
이 세상이건, 저 세상이건 어떻게 행복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당하지 말고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지도 말고 원치 않는 삶을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고
죽음에 의해 죽임 당하지 않고 스스로 죽는 겁니다.
곧 자유와 사랑입니다.
사랑과 자유가 삶이든 죽음이든 그것을 의미 있게 하고
이 세상 삶과 죽음의 유한성을 넘어 영원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이때 우리의 삶과 죽음에서 발생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내 삶과 죽음에서 발생하면
이제 나는 스스로 곧 사랑과 자유로 하느님께 복종합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 곧 사랑에 평안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죽음으로 다가오건,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폭력으로 다가오건,
그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고 내맡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대한 뜻을 거스르는 폭력과 불의에 대해서는
또한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대적합니다.
헤로데의 폭력은 오늘날도 계속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는 어떠한 경우건 평안히 죽을 수 있지만
하느님 사랑 때문에
곧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나 순교할 수 있기를
오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에 희망해봅니다.
사실만큼 사셨으니 이제 돌아가셔도 된다고 얘기들 하시고,
제 욕심에 더 오래 사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저도 이제 돌아가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몇 살까지 살아야 살만큼 산 것입니까?
그리고 몇 살 이상이면 너무 오래 산 것이고,
몇 살 이하이면 너무 일찍 죽는 것입니까?
대략 7-80년 살면 적당하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 경우이고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면 그렇게 꾸역꾸역 오래 사느니
빨리 데려 가시라고도 하는 우리입니다.
아무튼 삶과 죽음이란 물리적 시간의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 즉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재내는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 축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질문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일찍 죽을 걸 왜 태어났을까?
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은 왜 있는 걸까?
저는 십대 때부터 삶의 의미 문제를 가지고 너무 고민을 하였고
그래서 자살 장난 같은 것도 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큰 의문은 결국 죽을 걸 왜 사느냐였고,
그것도 고통스러운 삶을 왜 살아야 하느냐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면 빨리 죽지 오래 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삶과 죽음의 절대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다면 오래 살건, 빨리 죽건 그게 그거고,
행복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살건, 저 세상에 살건 마찬가지다.
거대한 영원 안에서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이란
정말 거대한 바다의 작은 돛단배, 아니 낙엽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순간에 영원을 담는다면,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을 산다면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이 세상에서 죽는 것도 다 영원의 현재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삶과 죽음이 영원과 맞닿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영원을 산다 해도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이 영원의 지옥이니
이 세상이건, 저 세상이건 어떻게 행복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당하지 말고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지도 말고 원치 않는 삶을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고
죽음에 의해 죽임 당하지 않고 스스로 죽는 겁니다.
곧 자유와 사랑입니다.
사랑과 자유가 삶이든 죽음이든 그것을 의미 있게 하고
이 세상 삶과 죽음의 유한성을 넘어 영원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이때 우리의 삶과 죽음에서 발생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내 삶과 죽음에서 발생하면
이제 나는 스스로 곧 사랑과 자유로 하느님께 복종합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 곧 사랑에 평안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죽음으로 다가오건,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폭력으로 다가오건,
그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고 내맡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대한 뜻을 거스르는 폭력과 불의에 대해서는
또한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대적합니다.
헤로데의 폭력은 오늘날도 계속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는 어떠한 경우건 평안히 죽을 수 있지만
하느님 사랑 때문에
곧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나 순교할 수 있기를
오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에 희망해봅니다.
사전에는 없는 당쇠 신부님만의 단어!
그치만
그냥 듣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까실거리는 단어!
그러나
靈의로 듣는다면
염화시중의 미소를 담고 있는 단어~!!
사랑과 자유... 문장의 바뀜이 의미있게 다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