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첫째 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 얘기이고,
둘째 독서 베드로 서간은 과거엔 노아가 물로 구원받았음을 얘기하면서
이젠 노아의 홍수보다 그 본형인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사순 제1주일은 먼저 물의 세례를 얘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물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에 대해 착각치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이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할 때
물을 섭취하면 살고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뜻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물은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가지고 우리를 죽인 다음 살리시고,
우리는 물에 의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정교하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죽어야 할 내가 있고 살아야 할 내가 있는데
죽어야 할 나는 육의 나이고 살아야 할 나는 영의 나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육적인 나는 어떤 나입니까?
나를 추구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나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없는 나와 하느님 없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자기와 세상을 추구하게 하는 육의 영은 죽어야 하고,
육의 영과 대결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와 헌신의 영이
성령을 모셔 들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뒤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시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나 루카 복음과 달리
유혹받으셨다는 얘기만 할 뿐 유혹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고,
유혹받았다는 짧은 보고에 이어 복음 선포의 시작을 짧게 기술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의도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비로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빼먹어선 안 될 것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내보내시어 광야로 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악령과의 대면은 성령께서 원하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는 자주 대면하고
악령과의 대면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악령은 피할 것이 아니라 대면하여 이겨야 하는 것이고,
대결하여 이겼을 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악령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피하다가는 우리는 교회 안이나 수도원에 갇힐 것이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시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악령의 유혹과 시련은 성령의 승리와 단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레 겁을 먹고 악령과의 대면을 피하는 것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시려는 성령의 인도를 뿌리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디모1,7)음을 믿으며 힘차게 나아갑시다.
오늘부터 강론을 다시 올린다고 말씀드렸는데
너무 죄송하게도 오늘 늦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내일부터 심기일전 새로운 강론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