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2월 21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29,30)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이 말씀은 교회의 신비를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교회의 양 떼가 온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회개를 통해서 니네베에 이르고(요나 3,5 참조) 지혜에 대한 갈망으로 남방 여왕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리하여 평회를 이루는 솔로몬의 지혜를 알게 됩니다(참조: 1열왕 10,2; 2역대 9,1). 여왕의 나라는 갈라지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몸으로 만듭니다. 그 위대한 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연관된 것이며(에페 5,32 참조) 그 실제는 예시되었던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제 그 신비가 진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때는 솔로몬이라는 표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육신으로 여기 계십니다.
-암브로시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엑카르트는 흘러 나옴과 안에 머무름, 바깥에 있음과 들어감이라는 주제를 하느님과 신성을 체험하고, 창조주를 체험하는 일에 적용한다. 신성 안에 있는 자신의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왔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엑카르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침묵만이 있었다고 말한다. 신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신성 안에는 대화라든가 말이라는
게 없다. 신성 안에는 온통 일치만 있어서, 그것에 대하여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신성을 떠나 태어나거나,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밖으로 흘러 나오면,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이 일어서서 “하느님!" 하고 소리친다. 왜 그런가? 피조물은 피조물을 보면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또 다른 설교에서 이와 동일한 주제를 되풀이한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왔을 때, 만물이 소리쳤다. ‘여기 하느님이 계시다’라고." 이런 식으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 관해 말한다. 결국 하느님은 피조물의 창조주이고. 피조물은 기억이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하느님을 대변하고 있음을 안다. 실로. 피조물은 성서이자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시다. “피조물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설교할 생각을 품을 필요가 없다. 피조물은 저마다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고, 저마다 하느님에 관해 기록된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만 이 세계를 필요로 할 뿐이다. “이 세계 없이도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영혼을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12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2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5-8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해결의 시도:
국가와 교회의 중심 문제에 대한 참된 해결은 이로써 발견되지는 못하였다. 제국교회의 국가에 대한 봉건적 구속은 전 중세를 통하여, 아니 프랑스 혁명과 대국유화(1803)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대결과 싸움이 계속 되풀이되어 일어날 수 있는 접촉점과 마찰면도 함께 존속되었다.
클뤼니 개혁은 시초에 국가 안에서 교회의 자유와 독립만을 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거기에서 양자가 동동하다는 결론을 이끌었다. 수도자이며 동시에 지배자이고 선천적으로 황제적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육체적인 것에 대한 영신적인 것의 우월성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성을 추론하였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교황훈령」 27조에서, 미래를 위한 교황들의 교회정치적인 계획을 확립하였다.
그는 진본으로 간주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에 의거하여 교황권의 세계 지배 주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권력사상이 국가와 교회간의 대결을 점점 지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레고리오 7세에게서도 저속한 이기주의는 없었고, 오히려 매우 깊은 종교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었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까지도 교황에 의한 세계 지배의 실현을 완전히 종교적인 목표에 종속시켰다 하더라도, 권력 남용의 위험은 명백하였다. 교회가 언제나 그 위험을 모면한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1세 적발제(1152∼1190)가 황제의 세계 지배 이념을 다시 강력히 시행하려 하였을 때, 제권과 교권 사이의 새로운 다툼이 일어났다. 그는 알렉산데르 3세 교황(1159∼1181)과 대립하였다. 격렬한 다툼은 1157년 브장송의 제국의회에서 1177년 베네치아에서의 강화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특징은 황제 편에서 내세운 네 명의 대립 교황, 전쟁과 유혈 등이었다. 이것은 결국 강화가 다시 성립되고, 알렉산데르가 1160년에 내린 파문에서 황제가 해제되기까지 그리스도교 세계에 많은 불행을 초래하였다.(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