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3주간이 되면서 전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전합니다.
어제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과부와 나병 환자만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인 나아만과 과부도 구해주신 분이라고 하여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성전 정화를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치우라는 말씀대로 잡것을 치웠다면,
주님 말씀을 듣고 민족 편견적인 믿음을 깼다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인간의 잘못된 믿음들이 여럿 드러납니다.
우선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민족 편견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편견이 본래 나쁜 것이지만 편견적인 믿음은 더 나쁜 것이고,
편견도 다른 편견이 아니라 민족적인 편견은 더더욱 나쁜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다른 민족의 믿음은 틀려먹었고 자기들의 믿음만 옳다는 편견,
하느님께서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고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으신다는 편견에서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사랑하셔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실은 믿음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셔서도 안 되겠지요?
나아만의 믿음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많이 부족한 믿음이지요.
그는 치유를 받기 위해 엘리사에게 가는데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갔으니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랄까 믿음으로 간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 간 것이 아니라 종이든 엘리사든 인간을 믿고 간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엘리사를 믿었다는 표는
엘리사가 자기의 치유를 위해 적극성과 정성을
더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의사가 치유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의사가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굳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의사가 얼마나 능력에 노력을 더하는지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의사를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으면
의사의 능력이나 노력이나 정성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집에까지 오실 필요도 없고
자기 종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실 필요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또 요즘 자연 치유자들이 주장하듯
좋은 물이 치유해 줄 거라는 믿음도 비칩니다.
그래서 요르단강 물보다 자기 나라 강물이 더 좋다고 하고,
물로 씻는 세례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이 치유해준다고 믿습니다.
나아만은 또 치유를 받기 위해 자기의 정성도 극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정성이 부족하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 곧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들에게 밥을 줄 때 아들이 하는 짓 보고 줍니까?
예쁜 짓 하면 주고 미운 짓 하면 주지 않습니까?
먹고 싶어 하면 주고 먹기 싫어하면 안 주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면 주고 필요치 않으면 주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정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조건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우리가 받는 조건임을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한 나아만처럼 이제라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