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르 미싸빕’은 사면초가 상태인 사람, 외톨이, 요즘 말로 왕따란 뜻입니다.
전에도 이에 대해 묵상하면서 저의 비겁함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저의 비겁함의 고백보다는 ‘마고르 미싸빕’의 대단함을,
그래서 우리도 ‘마고르 미싸빕’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원하지도 않는 외톨이, 왕따가 있고,
우리가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마고르 미싸빕’은
의로운 외톨이요 더 나아가 거룩한 왕따이기에 본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혼자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일 수도 있지만
너무 큰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고통 그 자체가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죽고 나면 모두와 헤어지고
자기만 영원히 혼자 되는 걸까 봐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것도 버림받아 혼자 될 때 더 두렵고 불안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 혼자 되는 것도 두렵지만
사랑하는 이가 나를 버려버려서 혼자 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지요.
그러니 이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가 없으면 혼자 되려는 사람이 없고,
또 혼자 되는 것을 자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운 외톨이를 왜 되려 할까요?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옳은 소리를 하면 외톨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무릅쓰고
얘기하는 것인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소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경우 하느님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사랑하시고 공동체에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기에 싫고 두렵지만 그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목적이라면 믿음은 바탕입니다.
하느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 까닭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바탕에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옆에 계실 거라는 믿음,
복수가 필요하다면 그 복수를 하느님 친히 해주실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이 중심추처럼 밑에 묵직이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지,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