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표징을 일으키십니다.
그 표징을 통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바리사이들에게 알렸다는 것은
좋은 의도에서 나오거나
궁금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
고발의 의미가 더 큽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드러내시는 하느님과
받아들이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수록
반감만 더 키워갑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서
예수님의 일생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실패로 보이는 그것에서
또 다른 희망이 시작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것은
우리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을 위한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믿지 못하는 인간을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탓하기에 앞서
먼저 사랑해 주십니다.
세상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
당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이끌어 가시는 길이 아니라
당신을 거부할 수 있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과 반대되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나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노력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 자신을 더 움직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나타납니다.
애 쓰는 그 모습을
하느님께서 잘못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으십니다.
사실 어디까지 내 힘으로 하고
어디부터 맡겨 드릴 것인지
매번 그것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맡겨드리지 못하는 것에
하느님께서 매우 안타까워 하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표징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예수님께 그것을 설명해 달라고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는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조차 인간의 한계이고
그 한계를 인정해 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죽음을 선택하십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
그러나 그 변화의 시작은 사랑 체험임을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