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오늘 저는 강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수모는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 받지, 억지로 당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수난(受難)이라는 한자어를 뜻풀이하면 ‘받을 受’, ‘어려울 難’입니다.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받는다는 것이니 수동태(passive)입니다.
그런데 받기는 받되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수동태이되 능동적 수동태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통을 기쁘게 받게 하고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번역한 ‘Passio Christi/Passion of Christ’의
Passio 또는 Passion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 Passion을 흔히 ‘열정’, ‘격정’, ‘열광’ 등으로 번역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뜨거운 사랑’
또는 ‘불타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즉시 불나비를 생각하고
‘불나비사랑’이라는 옛 노래를 떠올립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무엇으로 끄나요 사랑의 불길
밤을 안고 떠도는 외로운 날개
한 많은 세월 속에 멍들은 가슴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자신을 불태우고 죽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죽어도 행복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의 수난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