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수난을 전하지만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파스카 어린양의 죽음과 비교합니다.
어제 독서에서 우리는
파스카 양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양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속죄 제사의 규정이 생기는데
여기에서 흠 없는 양은
죄를 지닌 인간과 맞교환을 하게 됩니다.
흠 없는 양은 인간의 죄를 가지고 가고
죄 있는 인간은 양의 흠 없음을 받습니다.
즉 제사를 통해 인간의 죄는 양에게 옮겨지고
양이 죽으면서 그 죄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흠 없는 양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나서
사람들은 바로 대사제 한나스에게 갑니다.
복음은 한나스가 예수님께 질문했다고 전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직접 전하지 않습니다.
그의 무능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해서
예수님을 다시 대사제 카야파에게 보냅니다.
카야파의 모습이 복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카야파도 죄명을 찾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윽고 빌라도에게 오지만
사람들은 고소의 내용도 없이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빌라도는 세 번에 걸쳐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신성 모독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빌라도가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하자
사람들은 말을 바꿔
황제 모독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황제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결국에는 우리 임금은 황제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의 죄목을 찾지 못합니다.
죄가 없는 분이기에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순간에 복음사가는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파스카 양을 먹는 원칙 가운데 하나는
뼈를 부러뜨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흠 없는 존재의 죽음
뼈가 부러지지 않은 죽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죽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죽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잡으러 사람들이 왔을 때
사람들 앞으로 나서시는 모습을
요한복음은 전하고
대신 겟세마니에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는 모습은
전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인류의 죄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죽음을 향한 당당함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끌려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수난 전에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이 사랑 표현임을
누구보다도 당신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잘 열매 맺도록
그 사랑을 잘 간직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