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여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이의가 있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만 사랑하셨다거나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셨다고 이해하는 것 말입니다.
똑 같이 햇빛을 주시는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만 더 사랑치 않으셨고,
모두를 다 사랑하셨고 똑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을 더 많이 받았는데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은 사랑하는 만큼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그 사랑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을 간절히 원할 것이고,
그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 만큼 그 사랑을 간절히 찾을 것이며,
그 사랑을 간절히 찾을 때 주님은 원하는 만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더 원하는 사람이 더 큰 그릇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한 옛날 고을 원님께서 맛있는 음식을 손수 마련하시고
원하는 사람은 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초대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걸로 이미 배부른 사람은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다른 먹을거리가 있는 사람은 작은 그릇을 가지고 갔습니다.
각기 좋아하는 만큼 그리고 필요한 만큼 그릇을 가지고 갔습니다.
당연히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큰 그릇을 준비해 갔고 마음씨 좋은 원님은 그릇만큼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가장 사랑했고, 원했고, 찾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주님을 찾지 않았고,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있음을 얘기했을 때도 무덤까지 갔지만
주님을 찾기 위해 간 게 아니라 빈 무덤을 확인하러 갔을 뿐입니다.
그랬기에 빈 무덤을 확인한 뒤 더 이상 찾지 않고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무덤에 남아 울며 주님을 계속 찾습니다.
그 다음 얘기는 오늘 독서기도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이 잘 묘사합니다.
“마리아는 찾았지만 처음에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찾았기에 찾아냈습니다.
찾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애타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소망이 더욱 강렬해져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룩한 열망은 그 성취가 지체될 때 더욱 커집니다.
열망이 지체되어 시든다면 그것은 참된 열망이 아니었다는 표시입니다.”
성취가 지체될 때 더 커지는 것이 열망이라는 것을
오늘 막달라 마리아를 기념하며 마음에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