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 48)'
사람들에게 자신으 소개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 경우에 주로 다음의 말로 소개를 시작한다. '김요한 형제입니다.'
수도복을 입고 있거나, 끌러지를 입고 있는 경우라면, 사람들이 쉽게 내 신분에 대해서 알아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김요한 형제입니다.' 라고 소개를 시작하면, 나중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당황한 사람들에게 주로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왜 수도자인 것, 혹은 부제인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이다. 혹은 심하게 표현하자면 왜 속였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내가 속였나? 자문해 보기도 하지만, 나는 속일 의도는 없었는데..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나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주님 안에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들이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는 것은, 아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 자매로 생각하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신이 인간과 형제가 되었다. 그렇기에 인간 사이에서 높고 낮음, 수도자, 성직자, 평신도의 신분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졌다. 모두가 다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과 함께 형제, 자매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그런 말에 당황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내가 수도자이기에, 내가 부제이기에 나를 존중해 주고 싶은, 다른 사람과 구별으 하는 것이 아닌, 구분을 해서, 더 신경 써 주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있음을 보곤 한다.
하지만,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사람들에게 받는 호의 보다는, 한 사람으로서, 같은 형제, 자매로서 받는 호의를 나는 더 좋아한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똑같다. 그렇기에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받아야 하고, 더 편한 것을 누려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수도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은, 더 불편한 생활, 덜 좋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그러한 과호의가, 내가 살아가려는 삶의 길에서 나를 뒤로 끌어내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그러한 편안함에 익숙해 있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익숙함은, 그러한 편안함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그래서 그 주어지지 않음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 더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 나는 아직 부족한 수도자이구나.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
형제로 살아간다는 것, 물론 포기해야 할 것도 있다. 가장 큰 것이라면, 사람들에게서 맏는 호의일 것이고, 관심일 것이다.
하지만, 형제로 살아간다는 것,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인간 관계에서 형제, 자매 만큼 가까운 사이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형제로 다가가는 만큼, 나는 그들과 더 가깝게, 밀접하게 된다. 내가 친누나에게 이야기 하듯, 나의 기쁨, 나의 어려움을 그들과 나눌 수 있고, 또한 나도 그들의 기쁨, 그들의 어려움에 함께 할 수 있다. 수도자이기에, 성직자이기에 일반 신자드레게 개인적인 사생활을 숨기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벽을 쌓고, 관계에 제한 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세세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고립되어 가는 모습은 그다지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열려 있음은, 형제, 자매 관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형제가 된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은, 아마도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그 모두에게 형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형제가 되는 것은, 우리를 일치로 이끌고,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형제가 되겠습니다. 저에게 형제가 되어주시고, 서로 형제, 자매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