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주님의 잔>
주님께서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당신 잔을 마실 수 있겠냐고 물으신 다음
당신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잔을 마실 의지가 있는지 물으신 다음
주님의 잔을 같이 마시게 될 운명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잔을 마실 수 있겠냐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야고보 사도가 생각한 잔은 틀림없이 축배의 잔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진짜 수난의 잔이라는 걸 알았으면 마다했을 텐데
축배의 잔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 있게 마실 수 있고, 마시겠다고 한 거고,
축배를 들기 위해서 어찌 고통이 없을 수 있겠냐고 가볍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전식으로 쓴 것을 먹듯
축배를 더 기분 좋게 들기 위한 사전 통과 의례로 고통을 생각했을 겁니다.
성취의 욕구는 고통이 클수록 강해지고
성취의 기쁨도 고통이 클수록 커집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특히 남자들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성취의 욕구 때문에 감수하고 성취의 기쁨을 꿈꾸며 감당합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 지내는 야고보 사도도 이런 남자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다른 보통 남자들보다도,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더 큰 자기 성취의 욕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주님의 첫 번째 제자들 중의 하나였고,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을 하실 때,
그러니까 죽은 소녀를 살릴 때나 타볼산에서 변모하실 때
다른 제자들은 놔두고 베드로, 요한과 함께 자기를 데리고 가셨으니
주님께서 천하를 쥐게 되실 때 자기와 동생을 중용하실 거라 기대한 거지요.
유일한 경쟁자는 오직 베드로 사도라고 아마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고보 사도가 어떻게 첫째로 수난의 잔을 마시게 되었을까요?
제 생각에 성취의 욕구가 컸던 만큼이나 좌절과 허무의 고통도 컸을 것이고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그 고통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허무는 바로 욕망의 세례요 욕망의 정화이잖습니까?
곪아 썩어 들어가는 상처를 긁어내면 새살이 돋듯이
허무의 고통만큼 욕망 대신 사랑이 싹텄을 겁니다.
틀림없이 그러 하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때 생각이 났을 겁니다.
주님은 자기를 영광의 자리, 곧
죽은 소녀를 살리고 변모하시는 그런 자리에만 대동하신 것이 아니고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겟세마니 동산에도 따도 대동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 잔을 같이 마시게 될 거란 말씀도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같은 잔을 마시고,
같이 잔을 마시는 것.
이것이 사랑인 거지요.
축배의 잔이 아니라 수난의 잔을 그는 마시게 되었고,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같이 마시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부르심 받았기 때문일까 첫째로 같이 마시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축배의 잔만 마시려는 제가 야고보 사도처럼
수난의 잔, 사랑의 잔을 마실 수 있는 날이 언제 을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