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능하면 우리말을 쓰자는 주의자인데
오늘 복음의 목자에 대해서만은 한자어를 쓰자고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의 번역은 주님을 “착한 목자”라고 번역했는데
한자어 “선한 목자”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선한 목자 안에는 착한 목자와 좋으신 목자의
두 가지 뜻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착한 목자라고 번역하면 아버지 보시기에 착한 아드님만 강조되고,
우리에게 참 좋으신 주님이라는 측면은 빠져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는 착한 아들이시지만 우리에게는 좋으신 목자시지요.
이는 마치 맛이 좋은 과일을 맛이 착한 과일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당신은 제게 참 좋은 목자십니다.’라고 해야지,
‘당신은 제게 참 착한 목자십니다.’라고 해서는 안 되지요.
어쨌거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목자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로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목자는 삯꾼과 다르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삯꾼은 돈을 벌려는 사람 곧 돈에만 관심이 있지 양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서
이리로 인해 양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 자기 목숨을 바쳐 구할 마음이 없습니다.
삯꾼의 관심 없음에 대해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당신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자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는” 유일무이한 구원자십니다.
사실 우리의 부모가 나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나를 구원하지 못하시고,
아무리 내가 나를 사랑해도 나의 구원에 너무도 철없이 무관심하지만
주님만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는 나를 구원하시려고 불철주야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구원자이시기에
당연히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주님께서 나를 아심은 나를 속속들이 아심이고
그래서 관심과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그 결과입니다.
나의 죄도 속속들이 다 아시지만
나의 약함도 아시고 나의 고통도 다 아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잘 그리고 다 아시는데
우리는 이런 주님을 알고 있고 잘 알고 있습니까?
양들도 당신을 안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주님을 잘 아느냐 그 말입니다.
주님을 잘 그리고 다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것만이라도 아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목자인데
우리는 그분의 착한 양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목자인데
나는 길잃은 내 이웃 양들에게 무관심하니
좋은 목자도 아니고 좋은 양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좋으신데 나는 착하지 않음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