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허무주의자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허무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허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저는 오늘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데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허무를 저는 왜 좋아할까요?
물론 그 허무가 제가 좋아할만한 허무이기 때문인데요,
제가 좋아할만한 허무란 창조적 허무입니다.
창조적 파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던 집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공연히 집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집이 이제는 더 이상 집으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보기 흉하기 때문에 부수는 겁니다.
그러므로 허무는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이고,
허무의 원조는 천지창조 이전의 허무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이렇게 애기할 수도 있습니다.
허무는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일 뿐 아니라 곧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천지창조 이전의 허무이셨고 거기서 모든 것이 생겨났으며
생겨난 모든 것은 이 하느님이신 허무로 되돌아가게 되어있다.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허무란 말은 빌 허虛와 없을 무無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하느님은 무無이십니다.
그러나 무이시지만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없애시며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로부터(ex nihilo)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은 허虛이십니다.
허이신 하느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시고,
그래서 텅 빈 분으로 늘 계시지만
비우심으로써 모든 것을 채우시시고,
텅 비어 계심으로 사실은 가득 차신 분, 곧 허허실실虛虛實實이십니다.
하느님은 이러하신데 우리 인간은 허무로 되돌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허물기는커녕 더 쌓으려고 하고,
비우기는커녕 더 채우려고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재산문제로 다투는 사람에게
탐욕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탐욕貪慾이란 게 무엇입니까?
욕구하는 것을 탐하는 것인데,
비우려하지 않기에 욕구가 생기고,
욕구를 채우려 하기에 탐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제부터 저와 수련자들은 여름 체험 프로그램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전 수련소를 떠나 지금 전남 장성 노인 요양원에 와 있습니다.
오는 길에 저희는 전에 제가 녹음해두었던 노래 하나를 듣게 되었는데,
그 노래의 내용이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입니다.
오래 간만에 이 노래를 들으며
진정 모든 것이 바람결의 먼지와 같음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지만
진정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가게 되어 있고,
우리의 삶, 특히 영적인 삶이란 바로 허무화의 삶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허무화가 바로 창조적 허무화입니다.
창조적 허무화는 상태를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새롭게 창조를 하시도록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것인데,
어차피 허무로 돌아갈 우리는 스스로 자신과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느냐,
아니면 스스로 허무로 만들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허무로 만드시느냐,
우리는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