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오래 전부터 의문이었던 것을 이번 축일에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셨는지 말입니다.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와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리실 때도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셨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이런 묵상을 특별히 하는 이유는 이것이 저의 지론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애를 할 바엔 아예 아무도 사랑치 않는 게 낫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제가 이런 지론을 갖게 된 것은 저의 어렸을 적 체험 때문입니다.
제게는 형이 하나 있는데 저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외할머니께서
표시가 나게 저의 형을 더 위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외할머니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저희 누나들 중 그 누구도
외할머니께서 저희 모두를 다 사랑하셨다는 걸 의심치 않았지만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가 형제들로 하여금 요셉을 시기질투하게 하고
급기야는 형제가 형제를 팔아넘기는 불상사까지 벌어지게 했듯이
어렸을 때는 저에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가 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똑같이 사랑하지 못할 바엔 똑같이 사랑하지 않기로 하였고,
과거 관구장을 할 때나 지금 수련장을 할 때나
제가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 제자를 특별히 챙기시는데
이렇게 특별히 챙기시는 것이 주님의 편애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 편애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할 때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시기질투하게 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코 편애를 하실 분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세 제자를 특별히 챙기시는 뜻을 우리는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뜻은 무엇일까요?
오늘 미사 감사송에 그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나이다.”
주님의 뜻은 이 세 제자가 당신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세 제자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수난 당하시고 제자들이 우왕좌왕하게 될 때
다른 제자들이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도록
세 제자는 자기들이 본 것을 증언해야 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세 제자가 그 증인이 되도록
세 제자에게 타볼산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고
겟세마니에서의 참혹한 당신 모습도 따로 보여주신 겁니다.
어느 공동체건 이런 희망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절망스런 상태에 빠져 아무런 희망을 보지 못할 때도
그만은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얘기해야 하는 증인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거운 책임입니까!
그리고 아무나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절망과 희망의 강을 건넌 사람,
타볼산과 해골산의 여정을 먼저 간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 제자를 특별히 챙기신 것은
편애가 아니라 무거운 책임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지금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희망이 되도록 미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