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베드로 서간은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이 거룩한 것입니까?
앞의 말에 비춰 볼 때 그것은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희망을 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서간은 희망과 욕망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즉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희망은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이고 욕망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 우리에게 희망이 없으면 안 됩니다.
도무지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은 그야말로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그래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경우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더 살아봤자 고통밖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더 살아야 할 의지,
곧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없겠지요.
이렇게 보면 욕망이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떻게든 사는 것이 목표라면 욕망이라도 있는 것이 나을 것이고
하다못해 세상 욕망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 많은 사람이 이런 욕망 때문에 세상 희망을 가지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신앙인의 희망,
영적인 희망과 다른 점이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희망은 어떤 것입니까?
영적인 희망은 우선 세상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희망은 쇠가 용광로를 통과하듯
세상 욕망이 다 좌절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영적인 희망은 하나도 없고 세상 욕망만 있던 사람은
이때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밤을 경험할 것입니다.
욕망이 빚은 세상 희망이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눈은 하늘을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밝히던 모든 불이 꺼질 때
그때 하늘의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어두워지자마자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고,
한동안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어둠이 꽤 짙을 수도 있고 그 시간이 꽤 길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절망의 고통이 너무 클 것입니다.
그래도 이 시간은 세상 욕망이 쏙 빠질 때까지 필요합니다.
사실 아직 어둡고 여전히 어둡다는 것은
세상 욕망이 아직도 있고 여전히 있다는 반증이거나
어둠의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조급증 때문입니다.
갑자기 빛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차츰 보이기 시작하듯
내게서 다른 것은 바랄 수 없고 어둠만이 나의 것이라고 인정할 때,
그때야 하느님만이 빛이심을 인정하게 되고 그 빛이 은총으로 비쳐올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얘기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타난다는 것은 없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으로 가득할 때는 내 안에 없던 빛이신 주님이
욕망이 좌절되고 어둠으로 가득할 때 은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 빛으로 거룩해지고
거룩한 희망을 지니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