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하는 성녀 막달레나(1794-1796)
작가 : 안토니오 카노바 Antonio Canova1757-1822
크기 : 대리석 청동 95x79x77cm
소재지 : 이태리 제노바 노바 스트라다(Nova Strada) 미술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녀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13번째 사도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막달레나 성녀는 창녀 생활을 하다가 회개한 여인으로 알려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놀랍게도 교회 역사에서 성군으로 칭송 받는 그레고리고 대교황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교황은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타락한 생활을 하다 참회했다는 여인에 대한 일화들을 모아 짜깁기 하고 이것을 성녀 막달레나라는 인물로 귀착시키면서 성녀 막달레나는 창녀로 회개한 크리스챤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성서의 구절 중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2,3에 나오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칼로 그 발을 닦은 여인, 루카복음 7,36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사는 고을에 있는 죄인으로 평판되는 여인의 모습, 요한복음 8,3-11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관한 내용을 합성해서 성녀 막달레나가 만들어 졌고 이것이 교황의 말이라 아무 의문이나 저항이 없이 교회에 퍼지면서 성녀에 대한 이미지는 회개한 여인이라는 것으로 압축되었다. 한마디로 회개하는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너무 고심하다 보니 엉뚱한 자료를 통해 이것이 전달되었고, 그 예가 바로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로 정착되었다.
헌데 이것은 우리 교회만의 가르침이고 개신교는 물론 우리와 같은 신앙 분위기를 풍기는 동방교회에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믿고 있으며 이런 현실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도 이것을 반성하고 개신교나 동방교회의 견해로 돌아갈 것을 노력하고 있다는 긍정적 징표로 볼 수 있다.
어떤 선의의 방법이던 사실을 왜곡하면서 전달한다는 것은 하느님 이전 인간의 태도로서도 잘못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고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처음 만나 부활의 산증인이 되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여성으로 이해하는게 가장 성서적인 바탕에 맞는 것이다.
이런 근거의 바탕을 줄 수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미지는 성서의 다음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루카 8,2에 나오는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여인
마태 27,56에 등장하는 예수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는 여인 중 하나
요한 20,15에 등장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여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녀 막달레나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13번째 제자”라는 것은 참으로 막달레나의 위상을 바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근년에 온 세계를 발깍 뒤집어 지게 만든 ”다빈치 코드“라는 책에선 막달레나를 예수님과 결혼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는데 주장은 이렇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죽은게 아니라 가사 상태인 것을 제자들이 훔쳐가 치료해서 프랑스 지방으로 피신시키면서 그때 막달레나가 동반했는데, 거기서 막달레나와 부부처럼 살면서 자식까지 낳았다고 한다. 이 자식이 오늘도 프랑스의 왕족으로 살아 있다는 내용인데, 가톨릭 신자들인 우리에게는 황당한 것이나 성녀 막달레나가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이라는 관점만 생각한다면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면에서 교황님이 예수님의 13번째 제자로 신분을 격상시킨 것은 참으로 예수님을 너무 열렬히 사랑했던 막달레나 성녀의 진면모에 대한 합당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물론 작가는 예수님의 13번째 제자라고 부른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창녀로서 회개하는 여인의 이미지로 작품을 제작했다. 하긴 작가의 전 세기에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는 창녀의 이미지로 성녀상을 제작하면서서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으로 성녀를 묘사했으며 이런 시기에 작가는 신고전주의적인 기법으로 도나텔로와 전혀 다른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의 조각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이상화된 형태를 통한 아름다움의 추구를 지향하는 것이며 당시 사회가 지향하던 이상화된 형태를 통한 아름다움의 추구와 당시 유럽인들이 바라던 사회적 가치의 반영을 목표로 했기에 대단한 감동을 줄 수 있었다.
작가의 작품은 희랍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제작해서 많은 사람들애게 고전적 미학에 대한 동경을 불러 일으키면서 대단한 역할을 했다.
작가는 이런 고전적 아름다움의 전달에 너무 몰두하면서 교회 미술에 대한 표현은 그리 많이 하지 않는 처지에서 성미술로서의 이 작품은 작가의 작품 중 예외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막달레나 성녀의 모습은 더 없는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작가가 신고전주의 조각의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다. 눈은 아래를 뜨고 무릎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는 해골이 놓여 있는데 이것은 인간 밀애의 실상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바로 이 해골인 자기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허상에 정신을 빼앗겨 여러 잘못에 빠지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막달레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창녀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 삶을 시작한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모습이지만 좀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인간 삶의 실상을 바로 확인함으로서 어떤 유혹이나 착각에 빠진 우리 인생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또다른 의미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알리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의 인간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죄에 대한 자책감과 슬픔의 표현은 대단히 세련된 표현이 요구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회개의 눈물은 오히려 도나텔로처럼 인간적 처절함으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을 낼 수 있는 것임에도 작가는 아름다움 속에 너무도 품위있게 표현된 아름다움을 통해 회개라는 것이 인간 삶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표현했다는 면에서 회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표현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