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째 날: 깊은 감사
어떻게 하면 당신은 삶에서 더 감사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누구나 무엇을 잃는다면, 누구 혹은 무엇을 가장 그리워할 것인가? 당신은 누구나 무엇이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가? 그것을 고려하며, 그 사람들과 그 상황들과 그 무엇들에 대해 그 사람이나 하느님께 어떤 식으로 감사를 표현하는가?
첨언) 깊은 감사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깊은 감사는 내가 기대했던 것이나 나의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나의 생각이 깨트려질 때, 깊은 감사함이 솟아납니다. 그러하기에 나의 영역 너머에서 깊은 감사의 원천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통해 나는 나를 초월하여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깊은 감사와 연결된 깊은 세계가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는 자기와 형제들이 기대하는 훌륭한 형제가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이나 형제회가 위대해지는 곳에서 생겨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추운 겨울날 먼 곳에서 수도원을 찾아왔는데 형제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내칠 때, 그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곳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프란치스코는 비슷한 경우를 형제회에서 경험했고, 그때 그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세계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여정을 걸으며 그 세계를 맛보았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바닥 체험을 한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는지 인정받는 것에 민감한 이였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빠져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정’이 바닥에 떨어지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중독을 연구한 이들 중 누군가,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바닥 체험’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닥 체험’ =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합니다. 바닥 체험을 한 이들 가운데 10%만이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다시 일어난다고 합니다.
바닥 체험에서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닥 체험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약하고 힘없는 자기만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약한 자기만을 바라보는 움직임은 자기 안에서만 맴도는 움직임의 연장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한 환경에 있었고, 그는 불안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기 위해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충분한 인정과 충분한 사랑이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그는 다른 위안거리로 대체 인정과 대체 사랑을 받으려 했습니다. 이런 순환의 움직임에서, 바닥 체험은 자기 안의 순환 움직임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가 눈을 들어 주위를 볼 수만 있다면, 그는 달라진 환경과 달라진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불안할 것이고 생각한 주위가 그에게 큰 요동을 주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누군가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한 나이지만 자기 안에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도 깨트려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보석’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이 생각으로는 큰 불안인데, 실재로는 그렇지 않는 세계와(오히려 참된 평화) 연결된 가능성으로 그에게 다가옵니다. 그가 그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젖힐 때 그 가능태는 현실태가 되어 그는 그 세계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닥 상태의 그리스도에게 하느님이 일어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