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압도적인 사랑.
바라지 않는 사랑.
사랑이 곧 상인 사랑.
이것이 제가 오늘 복음을 간추린 내용입니다.
아니, 제가 오늘 복음을 간추릴 수는 없고 이렇게 간추려 묵상한 거지요.
그러나 오늘은 이 중에서 압도적인 사랑만 묵상을 해볼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압도적인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원수의 미움을 압도하는 사랑,
원수의 저주를 축복으로 되돌리는 압도적인 사랑,
원수가 뺨을 때리고 옷을 가져가도 초연할 수 있는 압도적인 사랑.
그런데 이런 압도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이런 압도적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입니다.
이런 압도적인 사랑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지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사랑이
원수의 모든 짓거리를 압도할 수 있을 때까지 씨름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야곱이 야뽁 건널목에서 밤새도록 씨름을 한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매우 야비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감히 하느님과도 씨름을 한 사람이고 밤새도록 씨름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형편없는 그를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야곱 이상으로 인간적이고
사랑으로 말하면 인간적인 애증이 어지럽게 같이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할 때는 언제나 미움이 옆에 도사리고 있고,
미워하면서도 미워만 할 수 없어 사랑을 하려고 애쓰는 존재입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야곱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쟁취하라고 주님은 우리게 도전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쟁취하라고 주님께서 도전하심은 물론
하느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뺏기지 말고 차지하라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사랑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여
하느님 사랑의 경지에 내가 오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하게 인간의 미움과 씨름하지 않습니다.
물론 시작은 미미하고 시시하게도 인간의 미움과 씨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향은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지향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미움과 씨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꿈꾸는 것입니다.
씨름 선수는 씨름을 하면서 힘을 얻고 기술을 터득합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약한 선수와 씨름을 하면 힘도 기술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과 연습을 하든 시합을 하든 해야 나아지지요.
우리의 사랑 씨름도 지질한 미움과 씨름을 하면 나아지지 않고,
지질한 미움을 이겨내는 지질한 사랑을 꿈꾸면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큰 미움도 압도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꿈꾸며
그 큰 미움과 씨름을 하고
그것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을 하며
축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끝낼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텨
마침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낸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사랑과 씨름을 하며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복을 받는 오늘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