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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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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가을

 

폭염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가을

 

하루 사이에 대지를 숯덩이처럼 불태우던 더위가 사라지고 성큼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지친 나무들은 이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폭염에 이미 숨을 거둔 가을 채소들, 갑자기 쏟아붓던 집중호우로 여기저기 물난리를 겪는 사람들, 여름날의 상처와 흔적은 사라지고, 자연은 다시금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날들은 마치 인생의 고난과도 같았습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성숙해질 것입니다. 가을은 그런 우리에게 위로와 안식을 줍니다. 가을의 첫 바람이 불어올 때, 나는 창문을 열고 그 서늘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남긴 피로가 서서히 풀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분하고 조용한 평화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지혜를 느낍니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은 살아있는 생명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고,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냅니다. 여름의 고난을 이겨낸 우리는 이제 단맛을 내는 청과처럼 내면에서 불어오는 상큼하고 신선한 바람이 되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선물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얼굴, 맑은 눈빛, 다정한 말씨, 환한 미소, 존재 자체로 조용한 평화를 건네고, 누군가가 말없이 다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러한 품으로 남아 겸손하게 나를 내어주려는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가을이 찾아오면, 나는 이름 모를 슬픔에 젖어 있기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움과 슬픔을 뒤로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으렵니다. 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단지 고난의 흔적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견디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가을 청과가 단맛을 내기까지 숱한 어려움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밤마다 왕진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길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생명의 에너지를 얻어 누리는 모든 피조물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폭염(暴炎)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가을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사랑할수록 깊어 가는 슬픔은 지난날 가을이 남기고 간 사연들이 많아서 그럴까요? 가을은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갑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떨어지는 이 계절은, 마치 인생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어느 늦은 가을날, 백양사를 혼자서 걸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마음을 울리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발밑에서 사각거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지난 시간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함께 걷던 그 길, 함께 나누던 이야기들, 그리고 그리움으로 남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듯, 우리도 언젠가는 이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리운 이들이 하나둘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함께 해준 벗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인생도 가을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삶의 깊이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집니다. 내 인생에 나와 함께했던 고마운 이들에게 한 분 한 분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를 동반하고 부축해 주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은 그렇게 죽는지 모르게 자신을 내어주면서 죽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을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별빛을 바라봅니다. 별빛 아래서 나는 그리움과 슬픔을 엮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순간, 이 느낌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삶의 깊이를 더해주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게 합니다. 남은 시간이 아름다운 건 단풍의 색깔처럼 나도 그렇게 내어주는 사랑에 완전히 물들어 있을 때라는 사실에 수긍이 갑니다. 마지막 촛불이 다 탈 때까지 그렇게 촉신을 태우고 싶습니다. 말러 교향곡 아다지에토의 잔잔한 선율과 함께 가을이 깊어질수록 내 인생도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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