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손에 들려있는 나의 자유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높은 자리에 앉는 순간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걸 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성급하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진정한 동기나 의도를 잘 모르면서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객관적 진리에서 나오는 사랑과 무관한 판단은 위험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인간이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지 인간이 할 일은 아닙니다. 꼭대기에 앉은 사람만 그렇게 합니다. 누구는 지옥으로 보내고 누구는 하늘나라에 보내며, 자신의 통치를 드러냅니다. 무엇이 자신을 우월하다고 여기게 할까요? 자신이 바친 희생과 기도와 재능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고 더 거룩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이 바친 업적과 공로가 많을수록 지배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이 만든 저울과 잣대로 심판자의 행세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자만심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만심은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악(惡)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창세 2,16.17)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善)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육화의 도구로 주님의 손에 자신의 의지를 내어드립니다. 깨어지고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음에 대한 응답을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내어 주는 사랑이 시작되었으며 인간은 내어 주시는 사랑을 받아 내어 주는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모든 선은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성령의 활동이며 공유하는 선으로 관계를 넓혀가도록 인간의 내면에서 일하십니다.
영의 현존은 그렇게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현존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뿐입니다. 경험된 지식으로 내면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내 의지가 도구로 사용될 때, 또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안에서 내어 주는 사랑이 크면 클수록 영의 현존을 더 크게 경험하였습니다. 나의 기도와 관상은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난과 겸손으로 만들어진 나의 빈자리에서 영의 활동을 봅니다. 도구적 존재로 인식하는 나의 변화는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나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로, 나를 통하여 너와 피조물로 확장되는 선과 너를 통하여 나에게 전달되는 선을 보는 것이 나의 관상입니다. 거기서 나는 하느님을 더 알게 되었고 나를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순간 상처 입기 쉬운 몸과 열린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순응하는 복음적 불안정, 현존은 거기서 숨을 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보호막을 하나둘 걷어내면서 영의 거처가 내 안에 마련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영의 현존 안에서는 벌거숭이가 되었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에게서 내가 점점 사라지고 마침내 나에게서 내가 완전히 해방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 곧 하느님의 통치안에 어린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나의 자유는 완전히 그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와도 단순하게 마주할 수 있는 자유,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그 자유야말로 내가 찾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도구가 된다는 사실은 완성된 기쁜 소식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선을 선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쁨이 샘솟듯 솟아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