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선 우리의 기도를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하는 기도와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체하더라도 들어주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기도하는 즉시 들어주신 경험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들어주실 뿐 아니라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니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께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빨리해주고 싶은 분입니다.
그러니까 지체가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지체하시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둑으로 치면 장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둑에서 인간은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면 장고에 장고를 거듭합니다.
어떤 때는 수를 찾느라 이삼십 분 끙끙대고 그런데도 못 찾기도 하지만
인공 지능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좋은 수를 찾아내는 데 1초도 안 걸립니다.
이것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인가? 말 것인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그래서 미적거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체치 않으신다는 것은 미적거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거나 들어주셔도 지체하신다면
당신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이유 때문에 안 들어주시거나 지체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거나 우리 믿음이어야 하는데 우리 믿음이
그러하지 못함을 잘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들어주시거나 안 들어주시거나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 들어주신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들어주지 않으실 이유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 들어주심이 우리에게 더 사랑이기 때문에 안 들어주시는 거라고 믿는 겁니다.
우리도 자식이 안 좋은 것을 달라고 하면
예를 들어 지금 고도비만인데 먹을 달라고 하면 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청은 아예 안 들어주는데 그것이 사랑이고 더 사랑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더 잘 아시는데
그렇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거나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다면 응답이 지체되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때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 마음은 조급하여 당장 들어주시길 바라지만
하느님께서는 나중이 더 좋다는 것을 아시기에 지체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보통 새벽에 나타나십니다.
밤을 꼬박 지새우고 새벽에야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밤새 풍랑과 싸우던 제자들에게 새벽녘에 나타나시고,
부활하신 뒤 밤새 고기잡이 한 제자들에게도 새벽녘에 나타나셨지요.
기진맥진할 때를 기다리시고 갈망이 깊어지고 희망이 단단해질 때를,
그때를 기다리신 것이고 진정 그때까지 애타시며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큰 갈망이 없이 청하고 기다리고 그래서 희망이 단단하지 않으며
그래서 안 들어주신다고 쉽게 실망하고 더 나아가 절망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애타시며 기다리십니다.
빨리 갈망이 깊어지고 희망이 단단해지기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지체하니 그것 때문에 우리보다 더 애타 하십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다 싶으면 지체없이 들어주십니다.
아시시로 돌아가면 당신 뜻을 알려주실 거라고 하느님은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셨고 실제로 산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알려주셨습니다.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이 말씀을 1205년에 프란치스코가 들었는데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기까지 3년여가 더 걸렸고,
그 후에도 그 깨달음이 계속되었던 것을 보면
완전한 깨달음까지는 프란치스코도 지체됐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미흡하여 지체되는 것이지
하느님의 판단 능력이나 사랑이 부족하여 미적거리거나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