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8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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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루카 18,35-38)
눈먼 사람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손이요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다
눈먼 사람은 인간의 수단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위를 힘 입어야만 그럴 수 있다는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나아가
듯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주님을 다윗의 자손 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유대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말씀들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의 이런 노래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셨으니 돌이키지 않으실 진실이라네. ‘나는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좌에 앉히리라’”(시편 132,11). 또한 그는 이사야 예언자의 이 말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 이사야는 이렇게도 말했지요. “보십시오,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이사 7,14; 마태 1,23). 그는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당신을 낮추시어 거룩한 처녀의 몸을 빌려 사람 몸으로 사셨다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이 지금 그분 앞에 나아가 이렇게 간청하는 것이지요. ”디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셨고,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만물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둘째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그분에게 명예를 안겨 드리든지 아니면 불명예를 안겨 드리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울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 자녀가 있어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달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자녀는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 5,8) 라고 주님이 몸소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여의고,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 안으로 풍덩 뛰어들어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의 일은 깨끗하고 때묻지 않아서, 영혼의 빛 속에서 성취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은 깨끗해서 영 안에 머무를 뿐,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280)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10-13장 / 야고 1-5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야고 2,14-26 믿음과 실천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창녀 라합도 심부름꾼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을 다른 길로 내보냈을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