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다섯째 날: 다른 이에 대한 진정한 관심
나에게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당신이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가 불친절할 때 자기를 보도록 말하면 분노로 치닫곤 하였다. 그는 종종 자기중심적이기도 했고 심지어 다른 왕따를 시키곤 하였다. 그런데 그는 많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친구를 가졌다.
나는 ‘이것이 왜 그럴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가 사람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너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을 때, 그는 정말로 너에게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네가 그에게 말한 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묻기 위해 다시 연락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복도에서 누군가를 멈추게 하여 “어떻게 지내니?” 라고 물을 때, 우리가 진실로 그것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다른 이에게 더 마음을 기울여 그들이 다른 이로부터 자기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경험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은 있는가?
첨언)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반응적인(reactive) 삶과 수용적인(receptive)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회개 이전에는 반응적인 삶을 주로 살았다면, 회개 이후 그의 삶은 수용적으로 되어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누군가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을 들었을 때, 발끈하는 것은 진정 가난한 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 가난한 이는 보다 깊고 보다 넓게 자기와 타인을 바라보기에 반응적인 삶이 아닌 수용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관계에서 반응적인 것은, 누군가의 말이나 표정에서, 표면적에만 매여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하는 듯한 말을 하면, 나는 되받아치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버리거나 혼미해지곤 합니다. 내 안의 나와 너를 받아들일 여유 공간은 없고, 누군가의 어떤 말이 나에 대한 무시로만 다가오고, 나는 그것에 대해 되받아치거나 그를 무시합니다. 그러면 그는 이를 자기에 대한 무시나 공격으로 알아차리고 또 여유 없는 반응을 합니다. 이 관계성 안에서 상처는 깊어지고, 관계는 멀어져만 갑니다.
이에 반해 수용적인 관계는, 비슷한 상황에서도, 내 안에 있는 조금의 여유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그가 보이는 감정들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읽어내고, 그가 일으킨 나의 감정들과 그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이 작은 움직임이 나에게 여유를 조금 더 키우고, 그의 감정에 대해 즉각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대응하지 않게 합니다. 즉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시간을 주기도 하고, 반응식이 아닌 응답식의 표현을 하게 합니다. 이 안에는 너만을 받아들이는 움직임만이 아니라 나 또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은, 너에게도 작용하여, 최소한 너가 즉각적인 반응적인 움직임을 그만두며 너 자신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이러한 모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작용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만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던, 이루어지지 않던) 그것에만 맴돈다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반응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단계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침묵 가운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진다면, 우리는 수용적이 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도록 합니다. 나의 열어젖힘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통해 어떻게 작용하시는 바라보는 수용적인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기도와 응답을 통해 우리는 기도와 삶이 하나로 통합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나가 하나로 엮어져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