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 닦는 죽음
“먼저 잔의 속을 깨끗이 닦아라.” (마태 23,25-26) 미숙한 영성은 자기방어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도덕적 우위를 점령한 사람들은 우리를 하느님께 데려가지 못합니다. 도덕적 성취가 하느님 사랑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위선을 드러낼 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힘을 모았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도덕주의가 신비주의의 영역을 넘으려면 죽음이라는 확실한 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이 죽음은 일상의 작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내건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내어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죽기 싫어서 사랑의 대용품을 사용하려는 현상을 자주 봅니다. 이 대용품은 영성 생활의 초기에는 자신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죄가 무엇이고 죄를 짓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에 눈뜨게 만드는 것은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에 있습니다.
내면을 깨끗하게 닦는 것과, 땅에 떨어진 밀알의 죽음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일상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인식 안에서는 겉과 속이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성취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인과 응보적인 하느님으로서 그들이 만들어 낸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으로 가득 찬 그들의 위선을 질책하셨습니다. 본질적인 하느님의 진리에서 벗어난 그들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기준으로 누군가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도덕으로 포장된 자기 내면을 하느님으로 바꿔서 하느님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온통 우리 자신에 관한 것들입니다. 율법 준수, 계명 준수라는 명분으로 행위 동시적 만족과 싸우기 위하여 씨름하는 것이 우리를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 사랑으로, 복음으로, 진리로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다는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업적과 공로가 마치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미숙한 종교는 자기방어에 능한 사람만을 만들어 냅니다. 초기 단계의 신앙인들은 대게가 옳고자 하는 욕구,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려는 욕구,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욕구, 자기중심적 욕구를 따라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느님을 진실로 찾는 일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자신을 찾는데 그렇게 하면 하느님이 자신을 알아 주실 것처럼 생각합니다. 보이기 위한 동기들이 그렇게 재촉합니다.
사랑하려는 의지보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성장이 시작됩니다. 구원은 많은 양의 기도와 희생과 제물을 바쳐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넘치도록 주시는 사랑을 받아서 얻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신비, 우리가 필요한 것은 창조 때부터 이미 주어져 있고 아름답고 순수한 본질을 보는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해 너그러우셨으나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화를 내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바꿔 놓지 않은 그것을 후대에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변화는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순수한 동기가 순수한 변화로, 순수한 변화가 순수한 관계로, 순수한 관계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발견되는 장소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면 도덕적 승리를 앞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승리일 뿐입니다. 우월한 상태로는 하느님과 친밀하게 지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도구적 존재가 될 때만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내면의 깨끗한 상태는 죽음으로써 유지됩니다. 낮아지고 내려가는 죽음, 내려놓고 허용하는 죽음, 밀알의 죽음은 그렇게 주님의 영이 활동할 공간을 만듭니다. 내가 차지한 자리가 많을수록, 내가 운전대를 계속해서 잡고 있을수록, 그분은 내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잔의 속을 닦기 위해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아야 하고 거울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 프란치스코는 나의 거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