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19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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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들의 말씀 묵상✝️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루카 1,5-7)
예언자로 태어나 진리를 위하여 죽다
저는 그[세례자 요한]가 놀라운 방식으로 태어난 사실과 놀라운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실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중요한 일로 설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예언자로 태어나 진리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태어나면서 구원자의 오심을 예고하였고, 죽음으로 헤로데의 근친혼을 단죄하였습니다(마태 14,3-12 참조). 하느님께서는 약속에 따라 비상한 방식으로 태어난 이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비상한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도록 운명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자기 몸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즉 요한의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지요. 그의 출생과 죽음은 오직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토리노의 막시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이와 관련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구절을 외부 세계와 연관지어, 그가 우리와 함께 먹고 마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영적인 세계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실로 자신의 단일한 본성 속에서 아들을 낳으십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영의 가장 영적인 자리에서 아들을 낳으십니다. 가장 영적인 곳이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터는 나의 터가 되고, 나의 터는 하느님의 터가 됩니다. 이 터를 잠시라도 엿본 사람이라면 일천 냥의 금화를 한 잎의 가짜 동전을 대하듯 할 것입니다. 이 가장 영적인 터에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천국을 위해서, 혹은 하느님을 위해서,혹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위해서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책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난롯가나 마구간에서 일하는 것보다 영성 · 종교적 헌신, 감미로운 황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느님을 붙잡아, 그분의 머리에 두터운 외투를 덮어씌우고, 긴 의자 밑으로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한정된 방법으로 찾는 사람은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그 방법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은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방법도 동원하지 않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야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붙잡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 년을 살면서 삶에게 “왜 사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살기 위해서 산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자신의 터에서 살고, 스스로에게서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유없이 사는 것은 스스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의 터에서 행동하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행동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리고 그가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한다면, 그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나는 행동하기 위해 행동한다."(299)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7-14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왜 히야는 순종하지 않니? 그 우유를 마시면 아주 좋은 희생을 하는 건데 ...... 엄마가 저렇게 슬퍼하시지 않니?"
“그래! 난 그렇게까지는 생각 못 했어."
완전히 감동된 소녀는 어머니를 불러 사과한 다음 어머니가 권하는 것은 무엇이든 먹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다시 가져 온 우유를 싫은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고 다 마셨다. 그리고 루치아에게 말했다.
“그것을 억지로 마시기 위해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를 네가 안다면! "
이때부터 언제든지 권하는 것은 우유건 스프건 무엇이든지 받아 먹었다.
“이런 것을 먹기는 너무 어려워.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먹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어머니는 히야친따가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딸의 회복을 바라는 일념에서 영양만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같은 우유잔과 함께 쟁반에 먹음직한 탐스런 포도송이를 담아 가지고 왔다.
“히야야, 우유가 당기지 않거든 이 포도라도 좀 먹어라."
“엄마, 고마워요. 우유 마시겠어요. 포도는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 가세요."
소녀는 가슴에 걸리는데도 애써 마셨다. 어머니는 이제 딸이 우유를 좋아하게 되었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히야친따 곁에는 마음의 벗인 루치아가 있었다.
그녀는 루치아에게 말했다.
“그 포도 참 맛있게 보였지! 허나 예수님께 바치고 싶었던 거야."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