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을 듣고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자기에게도 그 장소를 알려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려주지 않고 떠나자
화가 나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를 찾을 능력이 없었을까요?
그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서
베들레헴이라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충분히 예수를 수소문해서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찾기보다는
수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내가 지금 아기를 찾고 있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는 그 사실을 드러낼 수 없어서
박사들을 몰래 불러서
그 정보를 물어 보았습니다.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아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우스운 사람으로 볼까봐
그것도 두려웠습니다.
감추어 두었던 두려움은
이제 수 많은 아이들을 죽이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 하고도
두려움의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미 에집트로 피신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연약한 아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느냐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지 못하고 감추었던 것이
오히려 엉뚱한 결과로 맺어졌습니다.
우리 안에도 크던 작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나만의 노력으로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만의 노력으로 해결하려 할수록
드러내지 못하고
그래서 헤로데처럼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에 두려워할만큼
나는 약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용기라기보다는
무모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에 두려워할 수 있어.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할 때
이 두려움에 나는 무너지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