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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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16-20)
가장 먼저 복음을 선포한 목자들
목자들은 천사에게 들어 알게 된 숨겨진 신비들에 관해 입 다물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알렸지요. 교회의 영적 목자들은 바로 이 일을 하도록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의 신비를 선
포하고,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존자 베다-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피조물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피조물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가득 채워지기 위해 비우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비움은 의도라든가, 목표라든가, 이유와 같은 것을 비우는 데까지 확장된다. 이와같이 하여 우리는 예술가가 그림을 그릴 때처럼 아무 목표 없이 그저 흐름과 흘러 넘침에 몸을 맡기면서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의도를 앞세우지 않고, 의로움이나 커다란 목적을 위해 특별한 의도를 품지 않고 덕스러운 일을 하고,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되 ”이유” 없이 한다면, 그 사람은 덕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덕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유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벗 사이의 사랑을 배우는 것과 같다. 그러한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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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제5주간 생태 회심 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3.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의식은 우주 자체에까지 손을 뻗는다. “나는 천상의 존재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똑같은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싶다 ... 우주를 존재하게 하고, 우주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천상의 존재들이 부단히 움직이면서 추구하는 목적이다." 엑카르트는 별과 혹성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
“우리가 천상의 존재들에께서 배울 점은 많습니다. 그들은 흔들림이 없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품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같은 특성들이 사람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혼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이 우리를 쥐락퍼락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하고, 얼마나 창조적인가를 가르친다.
“천상의 존재들은 … 모든 것을 감싸고, 모든 것을 품어 안습니다. 사람도 이 모든 것을 사랑 속에서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 벗과 원수까지도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벗은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받고, 원수는 하느님을 위해 사랑을 받습니다. 창조된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과 관련하여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돕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그런 까닭에 천상의 존재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목수가 집을 지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합니다.”
중세의 전형적인 관심사가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호 관계였던 만큼, 액카르트는 우주적인 경향을 띠는 자연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연은 선한 우주를 본받는다. 자연은 발생을 위해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꾀한다. 자연의 일차적인 목적은 우주의 보존이다." 이처럼 엑카르트의 영적인 자각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것으로 보건데, 쉬르만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엑카르트는 신학과 인간학과 우주론의 방법론적 구분을 폐지한다." 엑카르트의 시각은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통전
적인 시각이다. 이런 이유로,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이 통전적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처렴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가득 부어준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정답게 대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을 정답게 대하라고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 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과거에 있었던 것 - 우리의 공통된 근원 - 과 지금 현존하는 것 - 우리의 공통된 존재 -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것도 우리에게 훤히 드러날 것이다. 엑카르트는 우주가 미래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司化)다. “창조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에 협력하기 위해 노력한다. "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는 떼이야르 드 샤르탱의 시각과 유사하다. 그것은 우리가 “온통 하느님처럼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본디의 우리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실로, 우리의 흘러 니옴은 안에 머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