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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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요한 1,19-20)
사제들이 사제 집안의 사람을 찾아오다
자, 그러면 이제 요한의 두 번째 증언을 살펴봅시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요한이 누구인지 묻게 합니다. 그들은 세례자와 마찬가지로 사제 가문에 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5 참조). 두 부류의 심부름꾼이 세례자에게 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한 부류는 유대인들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보라고 보낸 ‘사제들과 레위인들’입니다.
다른 부류는 바리사이들이 보낸 이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사람들을 보낸 이유 또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들은 답변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특성에 맞게 부드러움과 호기심을 보이며 묻는 것을 잘 보십시오. … 그들의 질문에는 억지나 경솔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려 깊은 종들답게 질문을 합니다 ...
이 특별한 심부름꾼들은 온 세상에서 선택된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이들입니다 ... 그들은 지극히 정중하게 요한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취한 태도를 그리스도께 보인 이는 요한 자신입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시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하고 정중하게 물어보게 합니다.
-오리게네스-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선하신 하느님의 본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나에게 벗이 하나 있어서, 내가 바라는 모든 좋은 것을 그가 주었다고 합시다. 이런 이유로 내가 벗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벗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벗을 사랑할 때는 벗의 선을 위하고, 벗의 덕을 위하고, 벗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 곧 하느님이나 자신이나 어떠한 사물에게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을 위해서만, 그분의 본성과, 그분께서 품으신 모든 것의 선을 위해서만 그분을 사량합니다.
이러한 사랑만이 제대로 된 사랑입니다.
엑카르트는 이유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마리의 암소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암소를 사랑하는 것은, 암소에게서 추출해 내는 우유와 치즈와 이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외적인 부유함이나 내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와 동일한 원리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물은 하느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랑할 따름입니다.(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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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제5주간 생태 회심 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목요일 성모님의 날
4.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91-92항
91.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자연의 다른 피조물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인신매매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을 해치려는 마음을 지니면서,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생물종들의 매매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분명히 모순입니다. 이는 환경 보호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피조물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용서하는 이들로 찬미받으소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 보호는 인간에 대한 참된 사량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92. 또한 보편적 친교에 마음을 열면 이러한 형제애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잔혹함은 언제나 어느 모로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동물을 학대하도록 이끄는 비열함은 곧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어떤 피조물에 대한 것이든 모든 학대는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그 어떤 측면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우리가 큰 사랑을 한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평화와 정의, 그리고 피조물 보호는 서로 철저하게 연결된 주제입니다. 이를 분리하여 개별 주제로 다루면 결국 환원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엮여서 형제자매로 일치되어 멋진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으로, 우리를 형제인 태양, 자매인 달, 형제인 강, 어머니인 대지와 온유한 애정으로 하나가 되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