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4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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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7)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안드레아는 자신의 형 베드로도 그분께 데려왔습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 여러분이 그분을 본받는다면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인간적으로 나약하더라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으로서 보여 주신 겸손의 본보기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고난의 동반자임을 보여 주며 그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존자 베다-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엑카르트는 이 길 없는 길과 이유 없는 길을 종교적인 헌신과 수련에 서슴없이 적용한다. 종교적인 헌신과 수련은 하느님을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쉽게 둔갑시킬 수 있으며 하느님을 고통스러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억지로 밀어 넣기가 쉽다.
여러분이 난롯가나 마구간에서 일하는 것보다 영성 · 종교적 헌신, 감미로운 황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느님을 붙잡아, 그분의 머리에 두터운 외투를 덮어씌우고, 긴의자 밑으로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한정된 방법으로 찾는 사람은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그 방법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은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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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제5주간 생태 회심 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6.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220-221항
220. 이러한 회개에는 여러 가지 태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태도들이 서로 어우러져 관대하고 부드러움이 넘치는 환경 보호의 정신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먼저 감사와 무상성의 태도가 있습니다. 다시 말
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올 사랑으로 선물하셨기에 우리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포기하고 누가 보거나 인정하지 않더라도 관대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게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또한 이러한 회개는 우리가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세상의 다른 존재를과 더불어 커다란 보편적 친교
를 이루고 있다는 사랑에 넘치는 인식을 포합합니다. 신자들은 세상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바라보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모든 존재와 결합시켜 주신 유대를 깨닫습니다. 생태적 회개는 하느님
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을 증진시켜 주어, 창의력을 전개하고 열정을 북돋우게 하며,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로 봉헌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을 개인적 영광이나 무책임한 지배의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서 비롯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221. 이 회칙의 서두에서 제시한 우리 신앙에 대한 여러 확신들이 그러한 회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모로 반영하며 우리를 가르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이 물질세계에 몸소 오시고 이제 부활하시어 모든 존재의 내면에 현존하시며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당신 빛으로 밝혀 주신다는 확신이 포함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그 안에 인간이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질서와 역통성을 새겨 주셨다는 인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새들에 대하여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라고 하신 말씀을 읽고서도, 새들을 소훌히 대하거나 해칠 수 있습니까?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개의 이 차원을 분명히 드러내어, 우리가 받은 은총의 힘과 빛이 다른 피조물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도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그토록 훌륭하게 실천하신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숭고한 형제애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