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영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도자인 그분이 우리 구원을 위해 고난받으신 분이시고,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신 분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그렇지요.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분의 형제라고 불리고,
우리 구원을 위해 영도자인 분이 고난을 받으십니까?
다만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일 뿐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은총을 누려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리 지르며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도자를 상관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며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아는,
더러운 영의 모순은 무엇이고 왜 이렇게 모순된 행동을 취합니까?
하느님의 구원이, 구원이 아니고 멸망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은총이 아니라 괴롭힘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더러운 영이 생각하는 구원이 주님의 구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안주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더러운 영 얘기가 5장에서도 나오는데
게라사 지방에 예수님께서 발을 내딛으시자 군대라는 더러운 영이 마중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역에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시는 분으로 주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이란 자기가 살던 곳을 더럽게 집착하기에 더러운 영입니다.
죽게 되면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어떻게 해서든지 곧 더러운 돼지들 속에서라도 머무르려는 영입니다.
제 생각에 더러운 영이란 특별한 영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우리처럼 평범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더러운 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현재의 상태를 고집하며 안주하려고 들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입니다.
떠나지 않으려고 함,
현재에 안주하려고 함,
하느님께 가지 않으려고 함,
이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한 ‘악의 평범성’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