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5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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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기도 습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되 헛되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거운데 누가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 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루카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밤을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였다”(루카 6,12). 요한도그분의 기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l). 또 이렇
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늘 기도히는 사람의 기도는 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리게네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을 보는 방법에는 아무것도 끼어들지 못한다. “하느님을 알려면, 매개물이 없어야만 한다 ... 매개물이 없을 때만 우리는 영생의 직접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 이렇게 사물의 투명성과 창조주의 직접성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모두 되찾고, 영생을 맛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인류의 하나 됨이 빛을 발할 것이고, 인류는 하나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거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본성 안에 머물면서, 바다 저편에서 건너온 사람이든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하여 모든 거룩한 존재의 사귐을 새로이 경험하도록 시간과 장소가 정지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제대로 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사실 속에서 하나가 되기만 한다면, 만물이 현존하게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똑같이 하나 곁에 있고. 똑같이 하나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모든 성인의 복은 모두 나의 본성 속에서 나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사귐 속에서 시간을 뚫고 나가, 사랑인 하느님의 단일한 터에 보금자리를 치게 될 것이다. 그 보금자리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와 어깨동무를 하고서 이렇게 외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1요한 4,9).(31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5-7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1절: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클레멘스 5세는 국왕의 복수심에 불타는 요구에 굴복하고, 죽은 교황 보니파시오에 대한 소송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필리프 미왕의 요구에 따라 성전 기사 수도회의 와해에 협조한 것은 더욱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들 기사 수도회 회원들은 십자군이 끝난 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일찍이 십자군에 이바지하였으나 이제는 올바르게 관리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의 부유한 재산과 특권이 국왕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1307년 이래 그들에 대한 음모와 중상의 모든 기록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이단과 음란죄로 고소하고,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에서 약 2천 명의 기사회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잔혹한 고문에 의하여 강요된 자백들과 허위 고발들은 기사 수도회 회원들을 기소하기 위하여 제출되었다. 나약한 클레멘스 5세는 이 수도회를 구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왕에게 완전히 온순해져 이단의 혐의를 인정하고. 1312년 3월 22일에 비엔 공의회에서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성전 기사 수도회를 폐지하였다. 그후 그는 수도회의 재산이 정식으로 요한 기사 수도회에 귀속시키기로 판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프와 영주들이 그것을 횡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였다. 또한 필리프가 기사 수도회 회원들에 대해 계속 격노하여 그 회의 총장인 몰레를 무죄 선서에도 불구하고 1314년 이단자로 파리에서 화형에 처하도록 하였고, 그밖의 수많은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을 화형시키는 것을 묵인하였다.
교황 요한 22세 때(1316∼1334) 프랑스의 영향은 독일 제국에 대한 교황의 정책에 불길하게 작용하였다. 교황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핑계로 1323년에 황제 바이에른 공 루드비히(1314∼1347)를 그의 직무에서 정지시키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렇게 돌발한 싸움, 교권과 제권 사이의 세계적인 대결에서 문제는 이미 위대한 이념이 아니고 순전히 정치적인 목표의 것이었다. 교황권은 프랑스 이권의 조수가 되었고, 그것은 독일에게 쓰라리게 느껴졌다.(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