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생각게 합니다.
나는 진짜 하느님을 믿는가?
믿는다면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으로 믿는가?
왜 이런 생각을 또는 성찰을 하게 됐는가 하면
오늘 히브리서가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존재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겠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보다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존재하셔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적절하게 드신 비유가 있습니다.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를 주고 떠난 주인이 다시 돌아와 셈을 합니다.
다른 종들은 그것을 열심히 활용해 주인이 돌아왔을 때 불려 되돌려드리는데
마지막 한 종은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드리고 왜 그랬느냐고 추궁을 당하자
주인이 주지도 않고 빼앗아 가는 냉혹한 분이라고 믿기에 그랬다고 답합니다.
결국 그 종은 믿음대로 냉혹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종은 은총의 어좌로 나간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심판관의 어좌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 죄를 짓곤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만듭니다.
하느님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하느님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미성숙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죄에 갇힙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지은 다음 한 짓이고 그 후예인 우리가 이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왕인 이유는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많이 죄지었지만 자기 죄에 갇히지 않고
그 죄를 가지고 늘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아갔기 때문인데,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시편 ‘Miserere’가 바로 주님께 나아가며 바친 시편입니다.
그는 이 시편에서 “하느님 자비하시니”를 제일 먼저 입에 올리고,
자기 죄를 감추는 대신 오히려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아가
히솝의 채로 깨끗이 씻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씻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도 이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하며 레위를 단죄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제자로까지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제대로 받는 우리는
하느님 자비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믿읍시다.
그래서 자기 죄에 갇히지 말고 하느님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