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이고,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셨으니 우리도 주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아지심 중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유혹받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으셨다는 것이며,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혹과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고,
유한하기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고통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그 반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굶주림은 본성상 인간이 너무도 싫어하고 원치 않는 것이며,
반대로 먹는 것은 즐거운 것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기에 식도락이란 것이 있지요.
그러니 굶주림 또는 먹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어렸을 때의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고
이 고통과 비교하면 다른 고통은 사치스러운 고통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고통은 이렇게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반대로 원하지 않는 것,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곧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원치 않는 곧 하기 싫은 것을 다 피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즐거울 것이고 고통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인간은 유한하기에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고통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이렇게 인간의 조건인 측면도 있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내 원하는 대로 되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은 피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 나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눈을 돌리면
그래서 주님처럼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게 되면 영적인 고통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얘기하듯 주님도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심으로
당신의 고통이 영적인 고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고통은 우선 시선 돌림입니다.
고통에 갇히지 않고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고 이것이 실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린 고통에 신음만 할 뿐 기도로 바꾸는 데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그러므로 고통스럽기에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그런 관상적인 기도를 우린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기에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어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기도의 더 높은 차원입니다.
시선을 고통으로부터 하느님께 돌릴 뿐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 따르기를
한 번 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이런 영적인 고통을 받고 사랑의 순종을 산 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순종의 근본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도 근본에서 본을 받는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