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이 아닌 사람에게 회개가 그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의미라면
신앙인에게 회개는 개과천선의 의미도 있지만
흔히 하느님께로 돌아섬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준이나 관점에서 볼 때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는 하느님을 등지고 있지 않았고 하느님의 일을 등한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입으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등지고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예수를 등지고
앞장서 가혹하게 신자들을 박해할 정도로 하느님께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가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전했던 것은
그가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성적으로 믿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로 향했던 열성이 예수님께도 향했던 겁니다.
달리 말하면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예수를 박해했기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예수님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열성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에겐 열성이란 것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열성이 있는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지 않은가?
믿지도 박해하지도 않은 나는 아닌가?
세상살이도 대충 신앙생활도 대충 아닌가?
이때 우리는 시인의 시 한 편이 생각납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시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불이 또 다른 연탄을 뜨겁게 불타게 하듯
하느님께 대한 그의 뜨거움은 예수께 대한 그의 뜨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대한 그의 뜨거움은 이제 사람들을 향한 그의 뜨거움이 되고.
사람들을 향한 그의 뜨거움은 다른 이들을 뜨겁게 불타게 하는 밑불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알 불이
이웃 사랑의 밑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 사랑을 묵상해봅니다.
나의 사랑이 실패한다면
사랑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이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입니다.
그다음으로 실패한 사랑은
사랑을 포기한 것이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