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생각해봤습니다.
첫째, 선포하는 사람 측면에서 생각해봤는데
선포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포해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포자가 자기 말을 하면
성경 말씀은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봉독하는데 어떻게 자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말을 한다는 것은 선포되는 말은 성경이지만
선포하려고 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은 자기 말인 경우입니다.
의도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한 예입니다.
예를 들어 논쟁할 때 권위자도 자기와 같은 말을 했다는 식으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며
자기 말이 성경 말씀이고 성경 말씀이 자기 말이라는 식 말입니다.
또 자기 말을 하려고 함은 아니지만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들어내려는 의도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멋진 강론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칭찬받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나는 없고,
내가 주님이 되어서 또는 내가 주님인 듯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처럼 성령을 받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는 이사야서 부분을 읽으시는데
이것을 볼 때 성경 말씀은 주님의 영에 의한 선포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다.
둘째,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듣는 사람도 성경 말씀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라 다른 말을 듣는 사람이거나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도
다른 말로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안에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들은 다음엔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알아듣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인용한 이사야서를 보면 가난한 사람,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만족을 찾는 이들이 아니고 구원을 찾는 이들이고,
구원을 찾는 이라야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만족을 찾는 이들은 굳이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을 겁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달콤한 말로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다가 비 구원의 상태에 처했을 때야 찾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족은 인간에게서도 얻을 수 있고
인간의 만족이 더 달콤하고 자극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묻습니다.
나는 가난한가? 부유한가?
나는 만족을 찾는 사람인가? 구원을 찾는 사람인가?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