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성소 문제로 고민하는 한 수도자를 영적 동반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니 우리의 성소는
행복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냐고, 그러니 수도 생활에서 행복하지 않고
밖에서의 생활이 더 행복하면 그것이 우리 성소가 아니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이런 논리는 이분뿐 아니라 제가 관구장일 때부터 떠나려는 저의 형제들과
수도자들에게서 많이 접한 거였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수도 생활에서 행복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수도 생활 안에서 더 행복하라고 부르셨음을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겁니다.
사실 이런 수도자는 가난과 정결과 순종의 수도 생활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에 실패한 사람이고 여기서는 실패하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입니다.
수도원 안에는 사랑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하며 밖에서 사랑을 찾는 것이며
자기가 실패해놓고는 환경을 탓하는 것이며 자기 행복을 환경에서 찾는 것입니다.
행복으로의 부르심은 보편 성소입니다.
하느님께선 누구나 행복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도 생활만 행복의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수도원에서 먼저 행복하고 가장 행복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행복을 증거 하도록
부르심 받고 파견되는 사람이 수도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파견할 사람을 찾으시고,
이사야는 자기가 파견되어 가겠다고 주님 앞에 나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리고 복음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시는데
다른 사람 낚는 어부요 행복 어부로 부르십니다.
곧 행복을 주시는 주님께로 자기만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데려가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이요 ‘주님 체험’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한 토마처럼
하느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현존(現存) 체험’과 하느님 ‘현전(現前) 체험’을 하고
그 하느님이 바로 나의 주인님이시라는 체험까지 해야
나는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고, 그분이 보내시는 대로 가는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와 베드로가 공통으로 또 체험한 것이 바로 죄인 체험입니다.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고 하느님 앞에 내가 있다는 체험을 할 때
이때 인간이 체험하는 것이 죄인 체험과 한계 체험이며,
한없이 크신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기 체험입니다.
이렇게 무한하신 주님을 몰라뵈었다는 죄 체험이고,
이렇게 유한한 자기가 주님을 몰라뵈고 까불었다는 죄 체험이며,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겸손한 자기 체험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의 제일가는 어부였고 그래서 우쭐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왠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날 자기 장모를 고쳐준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배에 타
사람들을 가르친 다음 깊은 데로 가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님’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전날 자기 장모를 고쳐준 체험이 있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의 입에서는 이내 ‘주님’이라는 말이 나왔고 자기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스승이 아니라 주인이 된 이상,
제자 이상으로 주인님의 명을 따르는 종이 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베드로가 됩니다.
성소 체험은 하느님 체험이요 주님 체험임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