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지난 몇 주 그러니까 연중 1주부터 우리는 히브리서를 내내 들었고,
오늘부터 또 몇 주 그러니까 연중 7주까지 우리는 창세기를 듣는데
오늘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얘기를 우주의 기원 얘기로만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형제들을 창조하신 얘기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나의 창조와 시작 얘기로만 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구원도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겐 어떤지 모르지만 창조 얘기가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서 별로 성의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무 쉽게 무성의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너무 쉽게 그러니까 생기라 하면 바로 생기는
그런 구조로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2장처럼 손도 안 쓰고, 머리도 안 쓰고,
애도 안 쓰고 그저 말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도자기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도 더 쉽게 만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분이나 약하게 태어난 분들은
사랑도 없이 애쓰지도 않고 불량품으로 나를 만들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그러셨을 리 없다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지르신 분이 아니라고 믿어야 하고,
그것이 진정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고 우리의 올바른 믿음입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의 표현은 사랑이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크신 능력으로 창조하셨음을 얘기하려고 함이고,
앞에서 인용한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라고 얘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이들은 치유만 청했을 뿐인데
하느님은 구원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연중 감사송은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하느님은 사랑 없이 창조하지 않으시고,
창조만 하고 사랑을 거두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창조하신 당신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인자로이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병자들처럼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