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이 맞을까?
맞는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을지라도 복음사가들이 이 복음은 빼고
전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복음을 그대로 전해준 뜻은 뭘까?
실제로 이방인을 상대로 쓴 루카 복음은 이 얘기를 빼고 전해주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뜻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저는 ‘먼저’라는 말에 처음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지금까지 이 복음을 정말로 여러 차례 읽었지만 실로
처음으로 ‘먼저’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먹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먼저 먹이시겠다는 뜻이고,
그런 다음 이방인들도 먹이시겠다는 뜻입니다.
저희 식당을 예로 들면 봉사자들이 손님보다 먼저 식사합니다.
그것은 먼저 먹고 봉사하라는 뜻이고
먼저 먹고 힘을 내어 봉사하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주님께서도 유대인을 편애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을 홀대한 것이 틀림없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강아지 운운한 것은 너무 모욕적인 것이 아닐까요?
이것도 모욕주신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그리 믿어야겠지요.
주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믿어야겠지요.
어떤 깊은 뜻이?
그것은 여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당시 이교도 여인이 유대 남자를 지나가다가 만난 것이 아니라
찾아와서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그녀의 겸손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각오했던 것이고
주님의 모욕도 감수하게 하였던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는데,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을 외간 남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믿었을 겁니다.
자기의 청을 지나치시지 않을 분이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강아지라고 하는 이교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사가도 후대의 우리에게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겁니다.
자극을 받으라고.
보고서 배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