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말씀에는 주님의 깊은 실망감과 안타까움이 배어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헤로데와 같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제자들마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깝고 답답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다음,
제자들이 하지 못하는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시며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런데 맨 마지막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8장 14절 이하인데 8장 1절이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어제의 일을 오늘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고 깨닫지 못함이 문제이고 완고함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느냐, 그렇게 완고하냐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제 조금 가지고도 수천을 먹인 엄청난 기적을 봤음에도
배에 빵 한 조각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바리사이나 헤로데처럼 아직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고,
깨닫지 못한 것은 완고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바리사이들처럼 아직도 완고할까요?
제 생각에 깨닫는 것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가 깨지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깨지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선입견이 깨지지 않고는 새로운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 단단한 나의 고정 관념이 깨지지 않고는 새로운 사고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아직도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완고한 것은
그들 안에 형성돼 있는 것들이 너무도 단단하여 아직도 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언제 깨지고 언제 깨닫게 될까요?
우리는 언제 깨지고 언제 깨닫게 될까요?
사실 매일 깨집니다.
우리는 야단 맞고 난 다음 깨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 어제 깨졌다고 하는데
어제 한 소리 크게 들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그 한 소리로 깨진 것 같지만 실은 금이 조금 간 정도입니다.
한 소리가 실은 큰 소리가 아니라 잔소리였던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한 번 된통 깨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석수가 돌을 깰 때 백 번을 두들겨야 깨진다면
구십구 번을 두들겼어도 백 번째를 두들기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백 번째가 결정타(決定打)라고 할 수 있지만
쉰 번째는 필요 없고 아흔아홉 번째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첫 번째부터 아흔아홉 번째까지 다 중요하지만
실망 때문에 아흔아홉 번째에 그만두면
다시 말해서 백 번째 두드리기를 하지 않으면 안 깨집니다.
제자들이 완전히 깨진 것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이고,
깨달은 것은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강림하신 다음입니다.
주님과 같이 다니며 오늘처럼 수없이 깨졌지만
안 깨지다가 주님의 수난 다음 완전히 깨진 것이고,
그런 다음에야 성령께서 들어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깨진 것이자 열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두들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말씀으로 매일 깨집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며 오늘도 우리를 두들기시고 깨십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